한국 가톨릭여성신학회, 마리아 막달레나 재조명

“마리아 막달레나를 이성적이고, 사려 깊으며, 영적 체험으로 충만한 여성으로 그리는 일은 남성에게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도전이다. 복음서들이 전해 주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가부장적,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값싼 위로에 안주하려는 여성들에게 주체적 삶을 살도록 초대한다.”

지난 7월 22일 한국 가톨릭여성신학회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승격 1주년을 맞아 ‘죄 많은 여인’, ‘참회자’ 등이 아니라 사도로서의 모습을 재조명했다. 신학회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말하라 마리아여,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주제로 신학회 20주년 기념 강연을 열었다.

강연자들은 성경, 교부 그리고 가톨릭문화 특히 미술에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떻게 그려졌는지 살피고, 막달레나가 사도들에게 파견된 것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를 통해 전한 메시지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주가톨릭대 김영선 수녀(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는 2세기 중반부터 8세기까지 교부들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발표했다.

그는 당시 교부들의 주석으로 “마리아 막달레나가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른 여인들과 점점 동화되고, 마침내 성경 속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물로 만들어져 ‘참회자’의 모범이나 주님께 끝까지 충실한 개인적 신심의 모델로 제시된다”고 했다.

김 수녀에 따르면, 히폴리토(189-235)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사도들에게 파견된 사도”라는 칭호를 붙여 준 이다. 그는 부활한 예수가 여인들에게 나타난 것은 여성들도 그리스도의 사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 7월 22일 한국 가톨릭여성신학회는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말하라 마리아여,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주제로 신학회 20주년 기념 강연을 열었다. ⓒ왕기리 기자

그러나 이후 예로니모(347-419/420)는 ‘예수와 그 일행에게 시중들던 여인들’에 대해 주석하면서 이 여성들의 역할을 제자로 보지 않았고,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베푼 것으로 한정했다. 또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375-444)는 요한 복음을 주해하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신심 깊고 훌륭한 여인”,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이라고 하면서 그의 사도성은 강조하지 않고, 신심의 모범으로 제시했다.

대 그레고리오 교황(540-604)은 7장에서 예수에게 향유를 바른 죄인인 여자와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요한 12장의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동일시하는데, 그러면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참회한 죄인’이라는 별명을 갖는다.

또 김 수녀는 당시에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하와의 죄를 역전시킨 여성, 교회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하면서 개별성을 잃고 추상적 존재가 되었다고 지적했다.

히폴리토, 암브로시오(330-397), 존자 베다(672/673-735) 등 교부들은 마리아와 하와를 연결시키면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여성성을 지나치게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사도적 기능을 가리게 했다. 또 레오 대교황(440-461) 등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의 부활 뒤 교회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풀이하면서 점차 막달레나가 추상화된다.

김영선 수녀는 “교부들이 그들 당대의 여성에 대한 이해를 답습했다”며 “그 결과 누구보다 뛰어나게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이해했고, 그분께 끝까지 충실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료 여성들의 행위와 메시지에 정당한 권위와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교부들의 주석에서 문제 삼을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성경 본문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되살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막달레나를 회개한 창녀로 해석하고, 그의 성별을 부각할 때 막달레나를 통해 전하고자 한 예수의 복음이 어떻게 약화되었는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 7월 22일 한국 가톨릭여성신학회가 연 ‘말하라 마리아여, 무엇을 보았는가’ 강연 포스터. ⓒ왕기리 기자

그는 일부를 제외하고 교부들은 예수와 마리아 막달레나의 관계에서 스승과 제자, 친구와 협력자 관계의 모범을 읽어 내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막달레나를 영적 체험이 충만한 여성으로 그리는 일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도전이라고 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요한 20,17)

부활한 예수가 막달레나를 통해 전한 이 구원의 메시지에 대해 김 수녀는 “우리가 남성이기 때문에, 혹은 여성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계시하는 분이 아니시며, 그분은 모두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했다.

그는 “모두가 형제자매로 불리고, 한 형제, 자매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독려하는 공동체”가 예수의 활동 목적이었음을 기억하고, 그 복음으로 해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숙희 박사(엔 아르케 성경삶 연구소)는 예수를 충실하게 따르던 제자이자, 부활 증인, 사도들의 사도인 막달레나의 참모습을 성경을 토대로 설명했다.

그는 막달레나가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도, 베타니아의 마리아도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어 막달레나가 이 두 인물과 혼합된 것은 6세기에 대 그레고리오 교황이 복음서의 여러 인물을 혼합해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조수정 교수(대구가톨릭대)는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막달레나가 제자로서의 모습이 점차 흐려지고, 죄 많은 여자 또는 향유를 살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여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 '나를 만지지 마라'(놀리 메 탄게레), 프라 안젤리코. (이미지 출처 = wikiart.org)

그는 ‘나를 만지지 마라’라는 의미의 “놀리 메 탄게레” 도상은 막달레나를 예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한 제자라기보다는 예수를 붙잡으려 하고 그를 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또 바로크 시대에 막달레나 도상은 참회하는 성녀의 이미지가 되는데, 막달레나가 회개해야 하는 죄인으로 인식되면서 그의 과거 잘못 즉 쾌락 추구와 육체의 타락이라는 주제가 커지게 된다고 했다.

조 교수는 정(情)의 신학 측면에서 막달레나의 ‘다정한’ 면모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고 했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하다. 무장하지 않는다. 다정함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당장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상대를 다독이고 두려움을 몰아내어, 새로운 숨을 쉴 수 있게 한다”고 다정함을 설명하며, 예수도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날 강연에는 평신도, 수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했다. 대부분은 수녀였고, 남성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한 참석자는 아직도 한국 교회에서 여성은 시중들거나 뒷바리지 하는 처지에서 있는 것 같다며 이 발표가 어떻게 실천으로 이어져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 낼지 같이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임숙희 교수는 남성과 여성이 같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고, 성별을 떠나서 여성과 남성, 평신도와 성직자, 수도자가 함께 하는 모임 등이 그 실천이 될 수 있다고 답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