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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싸, 내 님이여[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엠마오의 저녁식사’, 디에고 벨라스케스. (1622–23) (이미지 출처 =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홈페이지)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많은 ‘엠마오’ 그림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엠마오에 당도해 예수님께 함께 묵고 가시길 청하는 제자들, 식탁에서 여전히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설전을 벌이는 제자들과 설명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빵을 나누어 주신 순간 달라지신 모습과 주님을 알아보고 놀란 제자들 등.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화가들은 한 번씩 그리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엠마오 사건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 의미를 제자들에게 긴 시간 함께 걸으며 알려 주신 과정이 갖는 고유한 부활 체험으로서의 의미와 상징성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그림의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계신 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나누어 자신들에게 주시고서야 주님임을 알아보는데 그러고는 사라지셨으니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기 직전이겠습니다. 이 그림을 처음 보고 잊지 않았던 것은 이 두 제자를 표현한 독특한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둘은 서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듯 비슷한 외모와 몸짓을 보여 주고 있는데, 그림에서 두 인물을 이 정도로 유사하게 표현할 때에는 특정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 간의 유사성은 왼편 예수님의 표현과의 대비를 통해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두 제자의 얼굴에 가득한 주름과 표정에 따라 움직인 근육들, 뻗은 손에 배긴 굳은살, 비교적 왜소해 보이는 체구, 심지어 머리카락이 뻗은 결까지. 클레오파스와 요한이라고 알려진 이 두 제자가 쌍둥이일 리는 없습니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요.

벨라스케스(1599–1660)는 생전에 초상화가로 매우 유명했는데, 그의 초상화가 갖는 특징 중 하나가 대상이 누구라 하더라도(광대, 왕족, 교황, 시장의 할머니, 귀족 등) 그의 일상성과 사실성을 담아내는 과감함이었습니다. 작가가 비교적 초기에 그린 이 그림에 등장하는 두 제자는 사실 이 바로 전에 그린 ‘세빌의 물장수’에 등장하는 ‘물장수’가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 2> ‘세빌의 물장수’, 디에고 벨라스케스. (1618–22) (이미지 출처 = 영국 런던 앱슬리 하우스 박물관 홈페이지)

태양이 작렬하는 세빌의 긴 여름에 흔했던 물장수는 당시 촌부의 전형이었고 무뢰한이나 사기꾼, 심지어 거지로 취급되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묘사된 물장수는 그 태양 아래 바래고 낡은 겉옷과 상한 얼굴, 깊어진 주름 등의 외모 안에 다음 세대에게 맑은 물을 전해 주는 상징적 사명과 위엄, 고뇌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물장수의 전형성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내적 의미를 부여해 표현했던 작가의 시선이 엠마오의 제자들에게서 다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여러 증언들에도 부활을 믿을 수 없던 제자들은 각자의 생업에 돌아갑니다. 베드로와 몇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가고, 이 두 제자도 ‘시골 엠마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들을 처음 부르셨던 그 자리. 그들은 시골 촌부였습니다. 특별할 것 하나 없이, 각자 조금씩의 차이가 있을 뿐 무식하고 볼품없는 생활인들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곁에서 함께하였다 하여 달라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하나 손에 못 자국이 선명한 주님을 앞에 두고는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 자신들이 ‘걸었던 희망’ 등을 열변을 토하며 이야기하기 바쁩니다. 서로의 표정, 몸짓 모두, 거울을 보는 듯 자신들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제가 이 그림을 보고 감탄과 웃음이 함께 나왔던 이유는 이 두 제자의 모습에서 저와 우리 수도 공동체, 교회 공동체가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같이 살면 닮습니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함께 먹고 기도하고 이야기하며 살다 보면 영 다른 삶을 살다가 만난 이들인데도 자매들이나 가족인지 묻는 이들이 많을 만큼 닮아 갑니다. 수도복을 입지 않는 수도회라 그 닮아감이 더 눈에 띄는지도 모릅니다. 쓰는 언어도 비슷해집니다. 내적인 동화는 더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넓혀 보아도 비슷한 맥락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다가 놓치는 그 순간들을 생각하면 조금 달리 보게 됩니다. 내 삶을 걸었던 주님이 그렇게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는 내 곁에 오시어 당신이 생전에 하셨던 약속, 오랜 세월 인류 역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셨던 약속이 이루어진 것임을 상기시켜 주시는 동안 나는 주님을 못 알아봅니다. 주님의 현존을 ‘듣고 보는’ 대신 내가 ‘듣고 본’ 제한적 경험의 역사를 그 주님께 설명 드리고 때로는 설득하느라 바쁩니다. 그래서 미사 성제를 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말씀 이후 ‘빵을 나누어’ 주시고 나서야 제자들은 알아봅니다. 아, 님이셨구나. 아뿔싸!

그림에서 빵을 손에 쥐신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잡히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시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주님은 이 순간도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아무리 말하고 보여 줘도 한결같이 못 알아듣고 못 알아보며, 자기들끼리 말하고 당신을 설득하기 바쁜 이 사랑하는 촌부들을 위해. 엠마오 사건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제자들의 주님 부활체험 기록에는 일관되게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다’와 예수님의 ‘아직도 마음이 이리 굼뜨냐’ 하시는 탄식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이 촌부들에게 예수님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몸소’ 함께하시어 ‘동에서 서까지’, 해가 뜨는 곳에서 지는 곳까지 복음이 선포될 수 있도록 함께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코 복음서의 끝맺음)

볼품 없고 천대받는 이면서도 사람을 살게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물을 전하는 역할을 했던 한 여름의 물장수. 제자들의 표현으로 이 물장수가 다시 등장하면서도 이전 그림에서 발견된 위엄과 고귀함은 오히려 빠진 듯한 것은 그 정체성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촌부들이 주님의 제자가 되었던 것은 '주님'이 계시고 이들을 부르셨으며 제자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정체성의 본질인 주님과의 관계 없이 우리는 누구입니까. 부활하여 몸소 오신 주님을 곁에 두고도 서로 마주보고 말하기 바쁜 우리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를 부르신 주님의 목소리를 기억하려, 우리에게 전하라고 주신 그 물, 사명이 무엇인지 새로 들으려 귀 기울입니다. 무엇보다 내 곁에 머물고 계시는 그분을 뵙고자 다시 침묵하며 눈을 비벼 봅니다. “아뿔싸, 님이시여!”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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