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그림 1) ‘거룩한 얼굴’, 조르주 루오.(1933) (이미지 출처 = 파리 퐁피두 센터 홈페이지)

퀭한 눈, 갸름하고 여려 보이는 얼굴. 두려움인지 공포인지, 그림을 마주한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꽤 오래전 조르주 루오(1871-1958) 전시가 대규모로 한국에 왔을 때 달려가서 찾은 이 그림 속 인물은 그 전 작은 인쇄물들로 볼 때보다도 더 약하디 약해 보였습니다.(그림 1) 그림을 둘러싼 액자와 그 선에 따라 안으로 겹겹이 그어진 선들은 가뜩이나 겁에 질린 인물을 가두고 위협하는 듯 했습니다. 이 고통을 피할 곳이 없는 운명처럼, 혹은 이미 기다리고 있는 죽음과 무덤의 두께처럼. 다행히 그때 이 그림 앞에는 관람객이 별로 없었고, 쉽게 시선을 옮길 수도 발을 떼 움직일 수도 없었던 저는 한참을 서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이렇게 두고 갈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 이것이 내 주님이신 예수님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내가 믿고 있던 구세주 예수님의 전지전능함과 크게 부딪힘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많은 성화들에서 그래도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함과 아름다움 등이 이 작품에서는 철저히 걷혀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림 속 예수님의 가시관이 마치 후광과 같이 그려져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놓치지 않게 해 주었지만, 이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의 인간다움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람 예수. 저에게는 예수님이 온전히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예수성심성월 동안 이 그림을 다시 마주하고 기도하면서야 조금씩 알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가 사람이 되어 오신 그 신비를 이해 못한 채 습관처럼 말 마디만 익혀 왔다는 사실을. 어쩌면 인간이 무엇인지, 제가 누구인지, 이웃이 누구인지를 참말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리도 강조하셨던 ‘사람의 아들’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알기 두려웠던 것일까요.

(그림 2) ‘모자를 쓴 자화상’, 조르주 루오.(1926) (이미지 출처 = 미국 현대 미술관 홈페이지)

이 그림의 작가 조르주 루오는 프랑스 근현대의 주류 작가로서는 드물게 종교화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중세와 근세의 종교화와는 확연히 다른 특징이 있었습니다. “예술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면 나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 나를 혁명이나 반항의 횃불처럼 그렇게 중요시하지 말아 달라. 내가 한 일은 하찮으니까. 그것은 밤의 절규, 낙오자의 오열, 목멘 웃음이다. 세상에서는 날마다 나보다 가치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일 때문에 수없이 죽어 가고 있다.” 작가가 당시 자신에게 쏟아지던 평론가들의 주목과 찬사를 두고 했던 말입니다.

(그림 3) '가면을 쓰지 않은 자 누구인가?', 조르주 루오, 미제레레 연작 중. (1912-27) (이미지 출처 = 리차드 나단슨 연구소 홈페이지)

그가 그렸던 “나보다 가치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중 대표적 인물들이 ‘광대’였습니다.(그림3) 그가 “밤의 절규, 낙오자의 오열, 목멘 웃음”을 본 이웃들이었습니다. 루오의 자화상을 보면 그가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그림2) 그의 대다수 자화상은 자신이 그린 광대의 초상들과 유사합니다. 광대 의상의 일부로 표현된 하얗고 동그란 모자와 이마의 표현뿐만이 아니라, 작가가 생전에 자신을 이 이웃들과 동일시했던 자전적 기록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림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광대는 당시 탐욕과 교만으로 쓰는 가면의 이면에 있는 인간의 진정한 얼굴, 동시에, 이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의 핍박과 웃음거리가 되는 가면을 써야 하는 이들의 역설을 보여 주는 존재로 그려졌습니다. 

루오에게 구세주가 사람이 되어 오셔야 했던 이유는 여기에서부터 발견되는지 모릅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작품을 통해 가난한 이들을 죽음에까지 몰리도록 탄압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던 권력자들과 사회 구조를 직접 비판했고 이와 연장선상에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당시의 권력자들과 수구 세력들의 폭압과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의 수난을 재조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과 죽음을 겪으셨고 왜 비천한 이로서 가난한 이들 곁에 오셨는지, 그보다도 근본적으로 왜 사람이 되어 오셨는지 루오는 알아갔던 듯합니다. 그의 많은 광대 초상 연작 중 (그림 3)은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대작 시리즈인 ‘미제레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그림으로 돌아갑니다. (그림 1)의 제목은 ‘거룩한 얼굴’, 즉, ‘성안'(聖顔)입니다. 저는 어쩌면 예수님 시대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를 믿어 왔는지 모릅니다. 전지전능한, 영광스러운, 아름다운. 이 작품 앞에서 느꼈던 충격과 당혹스러움의 정체는 그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던 이들의 눈에 예수님은 구세주일 수 없었고 그 믿음하에 예수님은 죽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루오가 본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은 자신을 포함한 가난한 이웃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진정한 구세주의 얼굴이었습니다. 이 거룩함은 우리 주님의 끝을 알 수 없는 겸손함, 그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구세주의 얼굴을 알아보아 가는 길은 나를 알고 이웃을 아는,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길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루오가 보여 줍니다. 예수 마음, 그 겸손하신 이의 신비를 깨닫고 사랑하는 은총을 청합니다.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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