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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모 파졸리)

켄 번스와 린 노빅이 만든 10부작 18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이 공영방송인 <PBS>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전쟁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 주며, 또한 전쟁이 그리스도교 전통의 발전에 끼친 영향도 보여 준다. 이 다큐는 종교가 전쟁 수행과 전쟁 반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자세히 보여 주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교회사가와 종교학자들에게는 특히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이 다큐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시기와 전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 뒤에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이었고 또한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인)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 1963)가 나온 뒤 일어난 첫 전쟁이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 중 남베트남군의 공격 뒤 시민들이 모여 있다. (사진 출처 = Commonweal)

요한 23세를 뒤이은 바오로 6세 교황은 베트남 전쟁에 관한 교회 안의 다른 입장들과 싸워야 했다. 심지어 최고위급 추기경들끼리도 의견이 달랐다. 예를 들어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로 유명했던 미국의 프랜시스 스펠만 추기경(뉴욕 대교구)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의장 네 명 가운데 하나였던 자코모 레르카로 추기경(이탈리아 볼로냐 대교구)이 붙었다. 레르카로 추기경은 1968년 2월에 볼로냐 대교구장직에서 해임됐는데(이는 당시에는 전례가 없던 일이고, 지금까지도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았다.), 바오로 6세가 베트남 전쟁이 끝나도록 도우려는 외교 노력을 펼치는 데 그의 공개적 입장 표명이 장애가 됐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 중심 가톨릭교회가 아니라) 전지구적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교회 안에는) 전쟁의 도덕성, 그리고 교회와 군의 관계에 대한 이해 차이가 뚜렷이 보인다. 미국에서의 가톨릭 평화 문화는 도러시 데이와 베리건 형제들과 같은 유명인들과 여전히 동일시된다. 이들은 예언자적이었고 미국의 주류사회와 생각이 달랐으며 미국 가톨릭의 반문화적 모습에서 핵심이다. 유럽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톨릭 신학은 전쟁이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며 교회와 신학이 다뤄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부인하는 데 세속주의적인 주류 유럽 문화와 근본적으로 한 입장이었다.

미국 그리스도교와 제도교회 가톨릭은 이와는 달리 좀 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했는데, 이에 따라 같은 제도교회라도 유럽과는 다른 분위기가 형성됐다. 예를 들어, 미국 주교회의는 지난해 11월에 군종대교구장을 주교회의 국제정의평화위원장으로 선출했는데, 유럽 주교들이라면 아예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대서양 양쪽의 두 가톨릭교회가 서로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주는 한 보기일 뿐이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교회 안에는 교회의 교리에 역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놓고도 이견이 있다. 즉, “세속의” 역사적 큰 사건(여기에서는 정치적, 군사적 역사)이 가톨릭 신학에 영향을 줘야 한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하는 의견 차이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황은 그의 유명한 “두 성서해석학” 연설(2005)에서 교리 발전에 역사적 사건을 고려해야 한다는 관점을 비판했다. 그는 좋은 성서해석학은 교회의 본질을 역사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철학적 존재로 존중한다고 말했다. “교회는, 공의회 전이나 뒤나, 같은 교회였고 지금도 그렇다. 하나이고, 성스럽고,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로서, 시간을 거치며 여행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선포하며 ‘세상의 박해들과 하느님의 위로들 사이에서 순례’를 계속한다.”

이것은 세속(즉 교회 밖) 역사에 별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 존재로 교회를 보는 관점이었다. 베네딕토 16세처럼 나치 치하 독일에서 태어나 자란 교황이 한 말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더욱 눈에 띄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 다큐를 보면 미국 교회와 바티칸이 오랫동안 공유했던 세계관이 만들어지는 데 반공주의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피는 데 도움이 된다. 베트남 전쟁에서 공산주의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1963-69)의 생각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그 밑의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나중에 요한 바오로 2세의 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된) 라칭거 추기경이 1980년대 남미 해방신학 문제에 대해 취한 태도와 다르지 않았다.

베트남에서는 공산주의 이념과 민족해방운동이 결합됐고, 남미에서는 1970년대와 80년대에 억압적인 체제로부터의 사회-정치적 해방과 식민주의적 가톨릭에서의 해방운동이 결합되었는데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방법론에 의지했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미국과 바티칸의 정치적-이념적 제휴는 중요한 교회적 사건들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에 영향을 줬다. 예를 들어, 교황청이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의 순교를 인정하게 하는 것이 어려웠던 것은 남미(정부들)의 반대- 본질상 정치적인 이유의 반대- 때문이기도 했지만, 로마에 있는 추기경들이 반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당시와 세상이 변했고, 당시의 (교회와 반공주의의) 지정학적-이념적 제휴는 약해졌으며, 이에 따라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과 미국 가톨릭의 주요 부문들 사이의 관계에는 위기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교황청 안에서의 이러한 노선 전환은 부분적으로는 소련이 후원하던 남미의 공산주의 운동이 1989-91년 사이에 끝난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큰 변화는 한 세대 뒤인 2013년에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가 직접 체험한 (남미) 공산주의는 전임자들의 경험과는 상당히 달랐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정학적 이해는 사회적, 정치적 체제들을 다르게 분석한 산물이고, 이는 서구의 가상의 세계질서와 그 질서를 지탱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정설들에 도전이 된다.

이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에 문제를 느끼는 한 주요 요인이다. 그의 교황직이 끼치는 영향은 그의 전임자들과 다른 개인적 정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가톨릭교회가 지정학적으로 전환하는 일부다. 로마는 이 전환의 진앙지이고, 미국은 그 진동을 가장 강하게 느끼는 곳이다. 정치적으로나 교회 차원에서나.

베트남 전쟁은 또한 교의와 교도권이 어떻게 변하는지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베트남 전쟁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시기의 신학적 역사에 핵심 요소다. 전쟁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던 시대가 끝난 뒤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다.

요즘에 우리는 현대 가톨릭에서 일어난 근본적 전환의 뚜렷한 예를 두 가지 지켜봤다. 하나는 이탈리아군이 요한 23세 교황, 즉 회칙 ‘지상의 평화’를 낸 교황을 이탈리아군의 수호성인으로 선택한 데 대한 이탈리아 가톨릭(일부 주교 포함)의 반응이었다. 다른 하나는 교황청이 (지난 9월 20일 유엔에서 서명식이 있었던) 새 핵무기금지조약을 곧바로 서명하고 비준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도 가톨릭 신학과 교도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차 대전(1914-18)은 “정의로운 전쟁”의 교리뿐 아니라 더 폭넓게는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전쟁을 보는 신학적 관점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1917년에 전쟁 중에 있는 민족들의 지도자들에게 평화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전쟁이 진행되는 데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에 관한 교황 언어에 뚜렷한 전환점이었다. 그 호소를 보면, 베네딕토 15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전쟁이 끝나도록 기도하라고 촉구만 하면 된다고 더 이상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한 그는 -“전면전”을 눈앞에 지켜보며- 자신이 전투원들에게 교회 건물들과 하느님의 목자들을 존중하라고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도 자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외교적 해결책을 직접 호소하였다. 전쟁은 더 이상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진 현대 세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로 해석되지 않았다. 그보다, 교황청은 다국간 공동행동과 협상을 선호하는 외교 주체가 되었다. 1차 대전은 (그 전쟁을 일으킨 이들이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운 바)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아니었지만, 교황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 전쟁은 전쟁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던 역사의 끝이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30년이 지나지 않아서, 1945년 8월에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터지면서 가톨릭 신학에 충격이 일어나는데, 오스트리아 철학자 귄터 안데르스는 우리가 하느님과 종교를 이해하는 데 핵무기가 끼친 영향을 논하는 “핵 신학”을 말하기에 이를 정도였다.

우리가 사회문제들에 대한 교회 가르침의 본질에 대해 정치-신학적으로 토론하는 상황 속에서, 전쟁을 보는 가톨릭 관점에 변화가 일어난 이 세기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가톨릭에게는 교황청의 외교 활동이 교회의 사고에 핵심 부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평화와 전쟁에 관해, 사회적, 경제적 발전에 관해, 인권에 관해 말이다.

교황 외교가 (국익을 우선하는) 국민국가의 외교 활동과 거의 비슷한 것이었던 데서 지금의 (그리스도교적 보편가치를 우선하는) 모습으로 진화한 것은 지난 20세기에 가톨릭교회 안에서 일어난 가장 심대한 변화들 가운데 하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근래 꾸준히 북한 핵위기에 대해 다국간, 외교적 해결을 호소하는 것은 현대 가톨릭에서 일어난 그러한 신학적 발전의 가장 최근 모습을 보여 준다.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1917년 8월에 발표한 서한에서 교황청이 지닌 국제적 역할에 대해 새 장을 열었다. 그리고 요한 23세는, 교황청 외교관 출신으로 교황이 된 마지막 인물인데, 1963년 4월에 ‘지상의 평화’로 정의, 공동선, 인권, 양심의 역할, 그리고 모든 이의 종교적 자유 존중에 대한 현대 가톨릭의 이해와 연관해서 평화와 전쟁에 관한 새 관점의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이 순간의 위대한 아이러니들 가운데 하나는 15-16세기, 즉 한 세속국가인 교황령이 있고 또 교황이 그 왕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교황 외교조직이 이제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신학적 진보의 원칙들을 적용하고 실행하는 임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황직에 대한 반대로 일부 가톨릭 집단에서 드러나는 반-현대적이고 신전통주의적 정서들은 지난 100년간 이뤄진 평화와 전쟁에 관한 (교회 안의) 발전들을 위험에 빠트리고 있다.

(마시모 파졸리는 빌라노바 대학의 신학/종교학 교수다. <커먼윌>의 편집자로서 기고도 한다.)

기사 원문: https://www.commonwealmagazine.org/vietnam-century-catholic-teaching-war-and-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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