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김지환]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 2017

"라틴어 수업", 한동일, 흐름, 2017. (표지 출처 = 네이버 책)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와 만나는 것

외국어를 배울 때 참으로 매혹적인 말이 있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와 만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만나고 이해하는 의미심장한 일은 녹록지 않다. 학교 수업과 입시, 그리고 취업을 위해 거의 피하기 힘든 영어는 갈수록 힘들어진다. 고등학교 때 추가된 제2외국어 독일어는 재미있기는 한데, 관사 변화부터 주눅 든다. “der, des, dem, den.’(요즘 이모 씨 덕에 독일어 정관사 중성 1격이 많이 회자된다. 정말로 ‘das’는 누구의 것일까?) 한 달 동안 배웠던 스페인어는 동사 변화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역지사지, 외국인이 우리말을 배운다면, ‘다르다, 달라, 다르지, 다르니, 달라서, 다르니까’ 만만치 않을 일이다.

앞서 말한 여러 언어보다 라틴어는 훨씬 어렵다. 라틴어는 문법이 무척 복잡하다. 명령법, 부정법, 분사, 동명사, 목적분사를 뺀 능동태만 해도 60여 가지가 넘는다. 동사의 다양한 어미변화는 물론이고 수동태의 어미변화는 훨씬 복잡하다. 동사 하나의 변화가 160여 개에 달하고, 명사 하나만 봐도 호격을 제외하고 단복수가 각각 1격에서 5격까지 5가지로 변한다. 명사를 꾸미는 형용사의 형태도 명사의 성, 수, 격에 맞게 다 일치해야 한다.

군대 가기 전에 휴학을 하고, 보람찬(?) 시기를 보내고 싶었다. 때마침 라틴어 수업이 개설되어 청강을 했다. 한 세 번 수업을 열심히 들었는데, 그때쯤부터 막 시킨다. 이거 감당할 일이 못된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동사 격 변화의 현란함에 주눅 들었는데, 아니 고유명사까지 격 변화를 한다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한 번 라틴어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신앙인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었다. 그리스어 수업을 해 주셨던 선생님께서 이어서 라틴어 수업을 해 주셨는데, 그리스어도 보통이 아니었나 보다. 수업 첫 시간에 하시는 말씀이 그리스어는 이렇고 저렇고 그런 데 비해 라틴어는 ‘땅 짚고 헤엄치기’라는 식으로 말씀하신다. 굳은 의지로 수업을 들었으나 그때도 한 세 번 나갔다가 포기하고 만다. 그런데 최근에 일부 고등학생이 고액의 라틴어 수업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특이하다 싶었다. 뭐, 이유야 있겠으나.

 

나의 세 번째 라틴어 수업

2번이나 기초 라틴어 수업을 중도 포기한 나는 이 책을 통해 세 번째 라틴어 수업에 임한다. 이번에는 누군가 시키지 않기에 참으로 수월하다. 물론 라틴어 자체를 많이 배우지는 못했다. 2010년 하반기부터 2016년 상반기까지 서강대의 한 라틴어 수업이 입소문을 타고 신촌의 대학가는 물론 일반인까지 찾아온다.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라 생각하는 영어도 버거운데, 왜 이렇게 라틴어수업을 들으러 오게 되었을까?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의 변호사라는 강사의 이력도 화제였지만, 강의가 인기를 끈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해 라틴어의 체계, 라틴어에서 파생된 유럽의 언어들을 배울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문화의 뿌리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음식, 놀이 문화, 사회제도, 법, 종교 등에 대한 풍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의 삶에 대한 성찰은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들여다보게 해 준다. 특히 학문에 대한 태도는 우리에게 배움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게 한다. 저자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살아가는 힘과 위안을 주었다. 이처럼 매혹적인 수업이 책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이제 더 많은 사람이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다.

라틴어는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려다보지 않고 수평성을 전제로 한다. (이미지 출처 = PxHere)

우리가 미처 몰랐던 유럽 문화의 기원

라틴어는 여러 상징성이 있는 언어다. 로마 제국의 확장으로 제국의 공용어로 자리 잡았으며,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유럽 사회의 학술과 외교 전반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로마 제국의 행정과 법률 체계를 그대로 물려받은 가톨릭 교회의 공식 언어이기도 하다.

소설가 장강명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한 문장을 말할 때마다 그렇게 상대와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 너는 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나는 너에게 존댓말밖에 쓰지 못할 때 나는 금방 무력해진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리 안에 갇혀 사라진다.” 이 말과 관련해 저자가 매우 의미 깊은 대목을 지적한다.

라틴어에는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특성이 있다. 우리가 종종 쓰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은 법률적 표현이고, 더 들어가 보면 라틴어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 마라’ ‘주의해라’와 같은 명령형이 아니라 행동의 주체인 상대방을 존중하는 표현이다. 저자는 이처럼 라틴어가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려다보지 않고, 수평성을 전제로 하는 말이라고 한다. “과거 로마가 스페인을 정복하고, 북아프리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지만 스페인이나 북아프리카 사람들은 로마에 지배당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로마는 식민지 출신의 사람들 중 우수한 인재들을 사회 전반에 기용했고, 이들은 로마 제국의 경영, 경제, 군사 분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언어는 사고의 틀입니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수평성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가 로마인들의 사고와 태도의 근간이 되었을 겁니다.”(44-45쪽)

라틴어 어휘를 보면 같은 단어에 발음이 다를 때가 있다. 이는 라틴어를 읽는 방식은 상고 시대의 발음도 있지만, 이것을 제외하고 크게 두 가지로 나뉘기 때문이다. 하나는 ‘스콜라 발음’ 또는 ‘로마 발음’으로 4, 5세기부터 시작해 중세를 지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용한, 변화와 발전을 거쳐 현재 이탈리아의 중고등학교에서 널리 읽히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를 ‘교회 발음’이라고도 한다. 또 하나는 ‘고전 발음’ 또는 ‘복원 발음’이라고 해서 고전 문헌을 토대로 르네상스 시대에 복원한 발음이다. 독일은 로마의 정신적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전 발음을 복원했지만, 라틴계(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는 스콜라 발음을 중시했다고 한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때 독일의 영향을 받은 일본을 통해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고전발음을 주로 따르게 되었다. 가령 '키케로'(Cicero)는 로마 발음으로 ‘치체로’, '카이사르'(Caesar)는 로마 발음으로 ‘케사르’로 읽는다.

책을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확인한다. 로마법에서는 젊은이를 가리키는 나이대가 만 20살부터 만 45살까지다. 이렇게 연령대가 길어진 이유는 군대에 충원할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부정적 이유 때문이지만, 유구한 역사가 흐른 지금 유럽인들에게 나이에 대한 강박을 덜어 주는 순기능을 했다고 저자는 일러 준다. 나이 때문에 일찍 무언가 포기하는 이에게 힘을 주는 대목이다. “당시의 평균 수명이 오늘날보다 훨씬 짧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라틴어의 젊은이라는 호칭은 인간의 가능성을 아주 크고 길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나 싶어요.”(180)

내 길을 가야 할 때 중요한 것은 내 걸음의 속도와 몸짓을 파악해 나가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친 영혼에 위안을 주는 수업

한동일 선생의 라틴어 수업은 삶에 힘을 주는 수업이다. 'Hoc quoque transibit!'(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위에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저자는 지금 진행형인 고통스러운 상황을 응시하는 법을 이렇게 일러 준다. “지금의 고통과 절망이 영원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어디엔가 끝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마침표가 찍히기를 원하지만 야속하게도 그게 언제쯤인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끝이 날 거라는 겁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그러니 오늘의 절망을, 지금 당장 주저앉거나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끝 모를 분노를 내일로 잠시 미뤄 두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나를 괴롭혔던 그 순간이, 그 일들이 지나가고 있음을, 지나가 버렸음을 알게 될 겁니다."(274쪽)

저자는 수업하면서 자신의 세대와 다른 청년을 만나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꼰대처럼 들리고, ‘당신이 우리 처지를 알기나 해’ 하며 대들 수도 있겠으나 저자의 이야기는 시대를 넘어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일러 준다. “'함께'(cum)하고 '더불어'(cum)하는 걸 즐거워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함께’와 ‘더불어’의 가치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 작은 힘이나마 필요한 곳엔 ‘더불어’ ‘함께’하겠다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주위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삶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겁니다.”(147쪽)

또 스스로 무언가 하기에 늦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100세 시대를 맞는 요즘, 조금 연배가 된 이들에게 힘을 줄 만한 이야기다. “새들은 각자 저마다의 비행법과 날갯짓으로 하늘을 납니다. 인간도 같은 나이라 해서 모두 같은 일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저마다의 걸음걸이가 있고 저마다의 날갯짓이 있어요.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고 이때 중요한 것은 ‘어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은 정확히 모르는 내 걸음의 속도와 몸짓을 파악해 나가는 겁니다.”(174쪽)

지난 여름날 하도 날이 더워 집 근처 카페에서 책을 펼쳤다가 쭉 빨려 들어갔더랬다. 책을 읽어 가면서 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참 행복했겠다 싶다. (만약 앞에서 말했듯 동사와 명사의 격 변화를 시키는 순간이면, ‘내가 미쳤지, 왜 이 수업을 듣나’ 할지는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유럽 문화에 대해 ‘썰’ 풀기 좋을지도 모르는데, 눈에 들어왔던 것은 삶과 학문의 문제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더 생각하게 하고, 살아가면서 풀리지 않은 문제를 응시하는 법을 일러 주기도 한다. 주위에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 있다면, 그가 책 읽는 것을 조금 좋아하는 편이라면 건넬 만한 참 좋은 ‘맞춤형 선물’이다. 살아가면서 위로도 정말 필요하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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