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창비, 2017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윤한봉 선생의 미국에서의 활동입니다. 국내에는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으나, 윤한봉 선생이 미국에서 만든 한인 청년조직인 ‘한청련’과 중년 조직인 한겨레는 해외동포의 인권운동에 길이 남을 큰 운동단체였습니다. 결성된 지 30년이 넘은 현재도 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워싱턴 등 미국의 4대 도시에 사무실을 갖추고 재미 한국동포 및 약소국 이민자들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윤한봉 선생은 이들 단체를 조직하고 이끌면서도 어떠한 직책도 갖지 않고, 심부름꾼이자 청소부인 ‘소사’를 자처하며 뒷바라지를 했다는 점도 큰 감동이었습니다.”('윤한봉 평전,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지침서', 작가의 말, 광주드림, 2017. 6. 19.)


▲ “윤한봉: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창비, 2017. (표지 제공 = 창비)
살아남은 자의 슬픔, 광주를 온몸에 새기다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인적 없던 이곳에/세상 사람들 하나둘/모여들더니/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모두 사라지고/남은 것은/바위섬과 흰 파도라네/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다시 태어나지 못해도/너를 사랑해/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아무도 없지만/나는 이곳/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김원중의 '바위섬'

혜성같이 등장한 김원중의 '바위섬'은 가요 순위 프로그램 '가요 톱텐'에서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1980년대에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바위섬'이 ‘1980년 5월 광주’를 상징한다는 소문을 듣기 시작했다. 학살 당국자인 신군부 정권 초기에 5월 광주는 이렇게 조심스럽게만 접근할 수밖에 없는 금기였다. 광주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진 건 대학가와 성당을 중심으로 진행된 광주항쟁 비디오 상영이었다.

윤한봉은 5․18 항쟁이 일어나자마자 핵심 주동 인물로 지목되어 1년간 도피생활을 하다가 1981년 미국으로 망명한다. “물론 이때의 망명이란 단순히 몸을 보존하기 위해 달아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의 망명은 정권을 찬탈한 자들의 수배망에서 빠져나와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싸우라는 광주 동지들의 명령이었다.”(38쪽) 하지만 평생을 짓눌렀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 그리고 죄책감이 그의 삶에 광주를 깊이 새겼다. “광주항쟁은 윤한봉을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정신적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4개월 만에 시애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동하면서 지은 새로운 가명은 김상원이었다.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최후를 마친 후배 윤상원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후배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감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니, 잊고 싶어도 잊을 수가 없어 차라리 끌어안고 살았다.”(65쪽)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의 생애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 같은 우리 현대사와 맞물리며 흘러간다. 1947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한 윤한봉은 1971년 전남대 농대에 입학한다. 고지식한 성격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공부만 열심히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유신은 그를 혁명가로 만들었다. 유신이 선포되자 “윤한봉의 인생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열불이 치밀어 올라 어쩔 줄 모르다가 방에 돌아와서 펼쳐 놓은 책과 영어 사전을 볼펜과 연필로 마구 찍어 대고 황소처럼 벽을 머리로 들이받으며 고함을 질렀다.”(210쪽) “이제 나는 공부는 끝이다. 나는 앞으로 저놈들하고 싸워야겄다. 나는 다른 놈들같이 치사하게 안 한다. 나는 목숨 걸고 싸운다!”(211쪽)

민청학련 사건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는 등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다. 들불야학 건립을 지원하고 농민운동가들의 활동도 후원하며 전방위 운동가로 활동하였다. 그에게 자신의 것은 없다. 힘겨운 일을 해 가면서 동지들을 챙기고, 운동의 자금도 마련한다. 자신이 가진 물건을 후배에게 다 나누어 주었는데, 심지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동지들을 위해 내놓았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물려주려 했던 땅을 받을 생각이 없었으나, 민주화 투쟁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나온 학교 동기며 후배가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니 그 땅을 이용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재산을 물려받은 큰형에게 찾아가 떼를 썼다. “‘형님, 나를 결혼시킨다 생각하고 미리 땅을 주시오.’ 큰형이 땅의 명의를 넘겨주자마자 미리 교섭해 놓았던 이에게 바로 팔아 버렸다. 거금 1200만 원이 나왔다. 서울에서도 좋은 양옥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윤한봉은 이 돈을 후배 정상용과 이강에게 주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거래로 연결하는 상점을 열어 보라는 아이디어까지 제공했고 후배들은 광주 농성동, 지산동, 주월동에 ‘꼬마시장’이란 이름으로 점포를 개설했다. 그러나 운영이 잘되지 않아 모두 망하고 돈만 날리고 말았다.”(140-141쪽)

합수, 늘 낮은 곳에 서 있던 사람

미국에서 윤한봉은 맨 먼저 ‘광주수난자돕기회’를 주도한다. 이 운동을 통해 금전적 지원뿐만 아니라 광주항쟁의 진상을 미국동포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미국 체류 기간을 10년으로 예상하고, 동포가 1만 명 이상 사는 모든 지역에 청년운동단체를 만든 뒤 전국적인 연합조직으로 묶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미국에서 목표를 이룬 뒤에는 유럽, 호주, 캐나다, 일본 등 세계 전역에 한국인 청년운동단체를 만들기로 했다. 1984년 1월 1일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을 결성한다.

윤한봉은 열댓 살 어린 후배가 찾아오더라도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합수 형’, 아니면 ‘합수 형님’이라 부르게 했다. 합수(合水)는 ‘똥과 오줌이 섞인 거름물’을 뜻한다. 그는 많은 이에게 푸근한 큰형 같은 존재였다. 윤한봉은 첨예한 이론보다 넉넉함과 따뜻함이라는 인간미로 무장한 인물이다. 책에 나오는 이 대목은 우리가 놓치는 많은 걸 떠올렸다. “윤한봉이 늘 강조한 것은 무슨 거창한 행동계획 같은 게 아니었다. 예를 들어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화장지가 다 떨어졌으면 새 화장지를 끼워 놓고 나오는 것이 조직훈련이며 학습이라고 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후에는 웨이트리스들이 수거해 가기 좋게 접시를 한쪽에 쌓아 주는 것이 조직훈련이라고 가르쳤다.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식사를 마친 후에 뒤치다꺼리는 웨이트리스에게 맡기고 농담이나 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115쪽)

그는 운동하는 사람의 약한 고리인 ‘인정투쟁’에 대해서도 늘 경계하였다. “인간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돈을 포기할 수 있고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지만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끝내 떨쳐 버리기 어렵다. 윤한봉은 이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날 좀 보소’ 식 운동은 안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회원들에게는 혹독하게 야단을 치곤 했다.”(118쪽)

또 그는 “‘깜둥이’나 ‘깜씨’ 등으로 불리던 흑인을 흑인 형제 또는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부르게 하는 등 약소민족에 대한 존중을 일상화하도록 했다.”(117쪽) 훗날 LA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 데서 그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 “우선 한인과 흑인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명백히 ‘한인들의 잘못’이라고 보았다. 물건을 사러 온 손님인 흑인들을 ‘니그로’나 ‘깜씨’라고 부르며 천시하고, 흑인 동네에서 번 돈을 백인 동네에서 써 온 한인들이 자초한 결과라고 보았다. 윤한봉은 평소에도 그런 한인들을 두고 겉만 노랗고 속은 백인처럼 하얗다고 하여 ‘바나나’라 부르곤 했다.”(313쪽)

통일조국과 대동의 꿈

윤한봉은 ‘반전․반핵을 위한 국제연대’ 조직을 주도했는데, 한국인이 해외에서 다른 민족과 국제적 연대투쟁을 주도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1989년에는 20여 개 나라의 유엔대표부를 방문하여 남북의 유엔 분리가입에 반대해 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이때 조국의 분단이 고착화한다는 절망감을 토로해야 했다.

국내외 상황이 달라지자 윤한봉은 신 노선을 제기한다. “이제 혁명의 시대는 갔어요. 여러분은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과 생활을 통일시켜 나가야 해요. 모든 회원이 생활 속에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천해 가야 합니다.”(316쪽) 아울러 북한의 일본인 납치 사건, 1987년 KAL기 사건, 한국전쟁 발발의 기원 등 기존에 자신이 가졌던 견해에 오류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입장 변화에 대해 변절했다거나 개량주의화되었다고 비난이 빗발쳤음은 안 봐도 그림일 것이다.

1988년 12월 윤한봉의 귀국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고, 1993년 5월 12년 만에 귀국한다. 그는 귀국 뒤 다음과 같이 간단한 말을 한다. “나는 영웅이 아닌 도망자일 뿐입니다. 명예가 아닌 멍에로 알고 살아가겠습니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338쪽)

윤한봉은 광주항쟁이 한국사에서나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시민들이 보여 준 대동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가 귀국한 1993년 8월 광주항쟁 관련 단체는 열 개가 넘었다. 이렇게 많은 단체가 난립해서는 광주항쟁 기념사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귀국 한 달 뒤에 이들을 모두 통합해 5․18재단을 설립하자고 제안했고, 그것을 성사했다.

책에는 우리 역사의 순간순간이 아로새겨져 있는데, 가톨릭교회가 험난한 시절 피난처를 해 주었던 모습도 드러난다. 책을 읽어 가면서 윤한봉을 ‘공동체적 인간’으로 조명해 보게 된다. 그는 늘 공동체를 소중히 여긴 사람이다. 고향, 조국 그리고 국제적 안목에서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몸소 보여 주는데, 이러한 삶은 ‘대동사상’으로 흘러간다. 한 거목의 삶은 평범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고, 딴 세상 사람처럼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가 끊임없이 귀감을 찾는 건 우리 삶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하고, 우리 삶이 아주 조금이나마 아름다워지고 세상에 다가가게 하기 위함이겠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