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김지환] "아무것도 아니야", 얀네 텔러, 현암사, 2017

"아무것도 아니야", 얀네 텔러, (정회성), 현암사, 2017. (표지 제공 = 현암사)

세상에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누군가 소개로 강상중 선생의 저서 “살아야 하는 이유”에 인용된 덴마크 작가 얀네 텔러의 소설 “아무것도 아니야”를 알게 되었다. 잠깐 소개된 그 책의 내용을 보니 종종 느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었다. 사실 그 문제의식은 누구라도 느껴 봤을 테다. 꼭 한번 읽어 보고 싶었는데, 책은 이미 절판되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다른 출판사에서 새롭게 나와 읽어 보았다. 이 책은 2001년 덴마크 ‘최고의 청소년 책’에 뽑혔고, 덴마크를 대표하는 문학상인 ‘덴마크 문화부상’, 미국 청소년 도서상인 ‘Michael L Printz Honor’와 미국 최우수 번역상 등 여러 상을 받았다. 출간되면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아 20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2016년에는 청소년 소설 최초로 오페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대단한 책인데, 책을 쭉 읽어 가면서 우리 기준으로 청소년 책 치고는 좀 센 듯 싶기도 하고 성인용으로도 읽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열네 살 안톤은 어느 날 반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던지고 학교를 떠난다. “의미 있는 건 없어. 나는 오래전부터 그걸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그럴 가치가 없으니까.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은 거야.”(7) 그저 단순한 사춘기 소년의 도발적 발언과 행위일 수도 있지만,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해 봤을 법하다. 의미는 매우 실존적 질문이다. 한때 신이나 도덕에 기댔던 인간은 이제 자신의 실존에 직면한다. 이제 자신을 강력하게 지탱하는 건 의미다. 세상은 자체가 의미 투쟁의 장이다.

아이들은 안톤의 도발(?)을 좌시할 수 없다. 안톤에게 의미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들의 의미 있는 물건을 모은다. 각자가 스스로 의미 있는 물건을 내놓지 않는다. 그것을 서로에게서 찾아내 ‘의미의 탑’에 헌정하기를 요구한다. 맨 처음 찾기 시작한 의미 있는 물건 중에 한국사회의 아픈 대목과 관련된 것이 등장한다.

“윌리엄은 미안하게 되었지만 플래토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면서 안나에게 입양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했다. 안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덴마크로 입양된 아이였다. 그 애는 한국의 부모님은 모르고 덴마크 부모님만 알고 있었다. 안나는 그때까지 한 마디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일에 잘 끼지도 않았으며, 누군가 자기에게 말을 걸면 눈을 깜빡거리며 땅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그 애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리가 윌리엄에게 항의하듯 말했다. ‘그건 안 돼, 윌리엄. 입양증명서는 출생증명서와 같은 거야. 그것은 늘 지니고 있어야 해. 함부로 내놓을 수 없는 거라고.’”(47)

아이들의 ‘의미의 탑’은 세상의 구경거리까지 되는데

한국 태생 안나의 입양증명서는 그나마 얌전한 편에 속한다. 각자의 가족사, 신앙, 재능 등과 관련해 가장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을 내놓으라고 한다. 이슬람인 친구의 기도 방석, 교회 십자가, 순결, 손가락 등 아이들의 의미 찾기 프로젝트는 점점 도를 넘어선다. 거기에는 묘한 앙갚음까지 더해져 소설은 갈수록 살짝 호러물처럼 흘러간다.

아이들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무리하게 쌓아 놓은 의미의 탑은 결국 발각된다. 동네 어른들은 경악을 하고, 그 끔찍한 현장은 방송까지 탄다. 심지어 나라 밖까지 알려지고, 미국의 유명한 미술관에서 의미의 탑에 작품적 의미를 부여해 사들이려 한다.

아이들은 의미의 탑이 미술관에 팔려 가기 전에 안톤을 불러와 의미를 강요한다. 그때 안톤은 의미 있다면 팔지 않을 거야 하며 그간 아이들의 노력(?)을 조롱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것을 쌓기 위해 자신들이 겪은 희생과 험난한 여정이 조롱받다니. 마침내 아이들의 분노는 폭발한다.

결국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안톤의 도발적 발언은 이제 의미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커다란 혼란이었다. 조금씩 가꾸어 가던 세계관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안톤에게 의미의 강요를 통해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키려 했다. 마치 신앙인이 불신앙인에게 신앙을 강요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끊임없이 소급해 들어가면서 의미를 깊이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인상적이다. 약간의 고통이 따랐던 그때 모든 의미는 다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만 홀로 남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데카르트의 ‘고기토 에르고 숨’처럼. 의미는 각자 삶의 지평 안에서 생겨났다가도 소멸하고, 한 사람, 한 사물, 한 사안을 두고도 생겼다가 사라졌다 한다. 또 의미는 상호적이지 않을 때가 많아, 내게 의미 있는 것이 누군가에게 반드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로 인해 소통이 단절되기도 하고, 상처 입기도 하고.

어느 우울한 날 깊이 생각하면서 모든 것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의미가 없기에 우리가 의미를 두기에 따라 모든 것에 또한 의미가 생기는 기막힌 반전이 도사려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의미생성의 투쟁인지라 의미를 부여하고 또 부여하는지 모른다. 의미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 주고, 생의 의지를 지속시킬 것이다. 의미는 외부에서도 오고, 자기 자신에게서도 끊임없이 생성될 것이다. 그리고 의미생성의 의지가 완전히 사그라진 이후에는 너무도 척박한 한 사람 ‘자신’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안톤은 이미 자신만의 의미 투쟁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 모른다. 회의는 다양한 의미 생성의 가장 기름진 밭이다. 인간은 의미 투쟁으로 ‘텅 빈 기표’를 채워 가면서, 예술, 학문, 사랑,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어쩌면 안톤에게 의미를 강요했던 아이들의 폭력성은 기성 체계에서 의미를 강요하는 폭력성의 은유일 수 있다. 아주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인간이라면 평생 떨치기 힘든 묵직한 주제의식을 던져 주는 책이다. 인간의 의미 투쟁은 각자가 외롭고 의연하게 마주해야 할 문제이고, 딱 떨어지는 답이 없기에 힘든 과정이겠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오히려 그렇기에 그 안에서 더욱 생동하고 깊은 의미가 생성되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져 볼 따름이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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