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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세상의 비참 한복판에서, 인간은 그래도 먹어야 했다[서평 - 김지환] "먹는 인간", 헨미 요, 메멘토, 2017
김지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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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7.04  14:3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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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물은 상품이 될 수 없으며, 의사소통의 수단이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음식과 의사소통은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기본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과식으로 죽는 사람이 없다면 배고픔으로 죽는 사람도 없어야 합니다.” 에드아르도 갈레아노, “60억 번째 세계 시민에게 보내는 편지”, ‘새로운 비행으로의 초대’, 들녘, 1999. 159-165쪽

“자! 이제 어설픈 연기는 결말에 이르렀다. 무대는 텅 비어 버렸다. 이제 떠나기 싫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길고 긴 휴식이다. 내 몸이 어떻게 처리되든지 더 이상 알 바 없다. 안녕! 안녕!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과의 영원한 이별이여! 중국 두부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천안문", ‘공산당 총서기였었던 취추바이(구추백)의 유언장 중에서’, 조너선 D. 스펜스, 이산, 2001.

오늘은 무얼 먹어야 하나 고민하는 현대인

   
▲ "먹는 인간", 헨미 요, (박성민), 메멘토, 2017. (표지 출처 = 예스24)
원생 시절 수업 마치고 학교 앞에서 동기들이 가성비 흐뭇한 돈가스를 먹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한창 나눈다. 동기 중 내 또래이자 주부가 있었는데, 그녀는 집에서 식단 짜는 문제가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준다고 했다. 음악을 공부했다가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려 했던 성격 좋고 씩씩한 안동댁 그녀는 집에 일이 생겨 얼마 안 있다가 학교를 그만두었다.

직장에서도 먹는 문제는 약간 골칫거리다. 정신없던 오전 일과가 끝나면 삼삼오오 몰려 나가면서 오늘은 무얼 먹을지 정해야 한다. 복날이라기도 하면 보신탕이나 삼계탕 먹으러 가자 소리라도 할 텐데, 평소에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해서 어떤 직장은 막내가 메뉴를 정한다고도 하더라. 명동성당 앞에서 일할 때, 메뉴 결정권을 장악한 (또는 우리가 넘겨준) 실장은 면을 무척 좋아했다. 그분 따라 명동 칼국수는 아니지만, 거의 하루걸러 한 번 근처 칼국수 집을 찾아간다. 면만으로도 충분한데, 덤으로 주는 공깃밥도 마다하지 않아 배불리 먹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그렇게 먹으니 그걸 소화하느라 오후에 졸음이 몰려오지.

하여간 우리는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하루도 무언가를 먹지 않고 살기 힘들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헨미 요가 쓴 “먹는 인간”은 그렇게 숙명처럼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먹는 문제’를 집요하게 다룬다. 그런데 이 책은 좀 꿀꿀하다. 보통 음식에 관한 책을 읽으면 아, 이 음식 먹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지만, 그렇게 풍미를 당기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의 먹다 남은 음식을 파는 현장, 필리핀 민나다오 섬에서 벌어진 일본군 패잔병의 인육 만행, 수많은 병사를 영양실조에 걸리게 하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 러시아판 방산비리 등. 인류 동포들은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먹고 사는가 쭈욱 찾아간다.

‘먹는 인간’, ㅇㅇ을 먹는 인간, 음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밑바닥을 보다

“인간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같은 질문은 사실 다른 듯하지만, 그다지 다르지 않은 질문처럼 보인다. 먹는다는 행위가 바로 삶 자체다. 예수의 공동체를 ‘밥상공동체’라고도 불렀던 건 먹는다는 행위의 의미를 적시한 표현이다. 언젠가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를 살았던 영성가 루돌프 스타이너가 당시 깨달음을 얻은 이가 줄어든 건 음식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을 들은 적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를 만들어 왔다.

헨미 요는 인간과 음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낸다. 하루라도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살아가기 쉽지 않은 인간에게 먹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음식이 어떻게 그 사회가 처한 상황과 깊게 연루되어 있는가를 드러내 보여 주면서 인간 존재의 밑바닥을 깊게 파고들어 간다. 그러면서 명명한 표현이 바로 ‘먹는 인간’이다.

헨미 요의 ‘먹는 인간’은 또한 과거로 회귀하기도 하는데, 먹는 대상도 충격이다. 일본은 아시아 곳곳에서 전선을 확대하며 발악했으나, 1945년 패전한다. 필리핀에서 일본 본국으로 가지 못한 패잔병이 민나다오 섬에서 피하며 살아갔다. 1947년 일본군 토벌작전이 벌어지는데, 20대 청년 살레는 일본군이 도망가면서 남긴 고깃국을 먹는다. 한창 먹다 보니 사람의 귀와 손가락이 드러난다. 섬사람은 증언한다. “‘어머니도, 여동생도 잡아먹혔어요.’.... ‘먹혔다.’ 이 피동사가 내 수첩에 순식간에 열 개나 나열되었다.”(66쪽) 그때 일본군 패잔병은 38명의 사람을 살해했는데, 그중 대부분은 먹혔다. 굳이 인육을 먹지 않아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다른 먹을거리가 있었는데, 왜 그런 만행을 저질렀는지 의문이라 한다. 이 사건은 한동안 은폐되었으나 서서히 세상에 진실이 드러났다.

중학교 도덕 시험에도 종종 나왔던 문제. 동유럽 국가 중 자발적으로 공산화가 된 나라. 1. 폴란드 2. 체코슬로바키아 3. 유고슬라비아 4. 헝가리. 답은? 3번! 딩동댕!!! 민족 평등, 자주 관리, 지방 분권이라는 모토로 티토의 영도하에 하나의 연방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티토가 죽은 뒤 10여 년 뒤인 1992년 내전이 일어나고 갈갈이 찢어진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등, 지금은 어떤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지도제작업체가 이때 골머리 썩었을 것이다. 내전의 살풍경 속에서 저자는 자그레브 동물원 앞 식당을 찾는다. 동물원 곰은 구경꾼이 준 빵을 먹지만, 바로 바깥에서는 많은 사람이 음식을 얻고자 줄을 선다. 독일에서 원조한 깡통 수프와 돼지갈비살이 한창 배급된다. “이곳에 이슬람계 난민이 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사라예보에서 탈출했다는 예순여덟 살의 여성 이슬람교도인 니콜라는 얼굴빛도 변하지 않은 채 돼지고기를 씹어 먹고 있다.”(153쪽) 평소 돼지고기는 종교적 금기인 이슬람인이 “돼지고기를 씹어 먹고 있다.” 얼마나 복잡하고 참혹한 의미인가?

러시아판 방산 비리의 현장은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1993년 러시아 태평양함대에서 수십 명이 영양실조로 입원하고, 그중 네 명이 죽는다. 군 당국은 네 명의 사망자가 원래 신체적으로 약했다며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폭로된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장교들이 통조림을 비롯한 식료품을 마구 빼돌려 시중에 팔았으며, 그 때문에 군대 음식이 형편없었다. 상급 병사, 이른바 짬밥 좀 되는 군인들이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먼저 챙기고, 신병들은 굶주려 쓰레기통을 뒤지게 된다. 비극은 그렇게 발생했다. “고개를 들이밀면 들이밀수록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부패의 진상이 보인다. 일찍이 ‘정의’라고 불리던 것이 티끌처럼 부서지고, 지금은 상식이 ‘악’과 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모든 것이 일그러져 있다.”(263쪽) 누군가 굶주려 죽어 가지는 않았지만, ‘어떤 나라’의 방산 비리를 떠올려 주는 풍경이 아닌가?

러시아 해군의 굶주림은 러시아 혁명기 ‘크론시타트의 반란’을 떠올리게 한다. 1921년 크론시타트에서 일어난 반정부 반란사건으로 규정하지만, 원인은 물자 부족과 굶주림이었다. 한때 혁명의 옹위자였던 크론시타트 수병은 혁명정부에 참혹한 상황을 개선해 줄 걸 요구하지만, 그것이 묵살되자 반란을 일으킨다. 결국 참혹하게 진압당한다. 그때 병사 소비에트의 해산과 주모자 체포로 응수했던 이가 공산당 지도자 미하일 이바노비치 칼리닌이다. 훗날 그의 이름을 따 ‘칼리닌그라드’라는 이름의 지명이 등장한다. 한때 동프로이센의 수도였는데, 독일이 패전한 뒤 1945년 포츠담 회담의 결과에 따라 러시아에 빼앗긴 땅이다. 바로 칸트의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다.

   
▲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한 음식을 즐겁게 먹는 세상’, 이것이 없으면 어떠한 물질적 풍요도 다 사상누각이겠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그래도 먹어야 한다,
인류 형제들의 참혹한 삶 속에서 건져야 할 것들


소련이 건재하고 미국에 유일하게 맞짱 뜨던 (또는 그렇다고 생각했던) 시절, 소련 최대의 곡창지대라며 ‘우크라이나 흑토지대’를 거론했다. 1986년 ‘체르노빌의 비극’이 소련의 비극에서 우크라이나의 비극으로 인지된 건, 소련이 붕괴한 뒤다. 체르노빌은 인간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멍청한 존재인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비극의 대가는 당국자가 아니라, 하루하루 선하게 살아갔던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농민들은 적어도 1000년 동안은 주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금단의 땅에 굳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단히 낙천적인 학자들조차 ‘먹지 말라’고 하는 경고를 과연 굳게 지키고 있을까? 아니다. 먹는다. 숲속의 버섯도, 생선도, 사과도 우적우적 먹고 있다.”(294쪽)

이 책은 저자가 교도통신 외신부에 재직했던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취재한 내용이다. 저자는 체르노빌을 목도하면서 깊은 참담함을 느꼈는데, 약 20년 뒤인 2011년 자신의 나라에서 같은 참사가 벌어진다. 저자는 후쿠시마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런 저자의 글을 읽어 가는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남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다음의 체르노빌’ ‘다음의 후쿠시마’를 넋 놓고 바라보는 형국과 뭐가 다른가? 최근 잦아진 ‘땅의 울림’은 ‘아직도 늦지 않았어’, ‘너의 뇌는 도마뱀의 뇌가 아니야’, ‘사람을 먼저 생각해’ 하는 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쭉 읽다 보니 에티오피아의 ‘아름다운 커피 로드’에서는 살짝 풍미를 당기는 대목도 있다. “설탕과 우유를 넣지 않은 갈색 뜨거운 액체가 목구멍과 위로 기분 좋게 스며들었다. 흙이 섞인 강물로 끓인 걸작 커피다. 마치 마법 같다. 두 잔을 더 마셨다.”(214쪽)

헨미 요는 음식을 매개로 인간 삶의 어두운 면을 주로 밝혀낸다.(이 책에는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와 저자의 인연도 나온다.) 그가 찾았던 곳 대부분은 굶주림이 만연하거나 폐허가 되었거나 분쟁으로 얼룩진 곳이다. 물론 이 책은 직접 기아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세상의 ‘먹는 인간’을 통해 인간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해 준다. 또한 세상의 ‘먹는 인간’을 통해 우리가 서로 이어져 있으며, 서로 바라봐야 한다는 연대감을 일깨워 준다. 저자의 힘이자 일본 르포문학의 힘이겠다.

이 책을 읽다가 예전의 충격적 경험이 떠올랐다. 어느 한겨울 날 그 장면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강연을 듣던 교회 앞에서 한 노인이 젓가락을 들고,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열고 그걸 먹는 것이다. 정신 이상의 문제인지 아니면 배고픔의 문제인지 알 길이 없으나,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가 배운 바에 따르면, 우리가 떠드는 바에 따르면, 적어도 지갑에서 돈을 꺼내 손을 잡고 쥐어 드리며 “할아버지, 맛있는 것 사 드세요” 해야 했던 것 아닌가 후회했던 경험이다.

엥겔 지수가 살짝 높을지언정 먹을거리는 풍요로운 우리의 연간 음식물 쓰레기 양이 북한의 1년 식량 생산량과 비슷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때, 첫 시작은 아마 먹을거리 문제 해결에서 비롯될 듯하다. 우리가 바라던 행복한 세상은 알고 보면 대단한 게 아닐지 모른다. 지금은 칼리닌그라드가 되어 버린 쾨니히스베르크 거리를 매우 규칙적으로 산책했던 칸트 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한 음식을 즐겁게 먹는 세상’, 이것이 없으면 어떠한 물질적 풍요도 다 사상누각이겠다.

김지환(파블로)
마포에서 나서 한강과 와우산 자락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왔다. 역사를 공부했고 그중에서도 라틴 아메리카 역사를 한참 재미있게 공부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이 지역 이야기는 가슴을 뜨겁게 한다. 여전히, 좋은 책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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