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쏘아 올린 교복 논쟁

지난 2월 12일, 이재명 대통령이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던진 한마디가 교육계와 학부모 사이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교복 구입비가 60만 원에 육박한다"며 교복을 "부모님들의 등골 브레이커"라고 지칭한 것이다. 대통령은 즉시 교복 가격의 적정성을 전수 검토하고, 담합 의혹에 대해 엄정히 대응할 것을 지시했다. 교육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등 5개 부처가 합동 회의를 열었고, 발빠른 움직임에 교복 시장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최교진 교육부 장관 역시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정장 형태의 교복이 반드시 필요한지 재검토할 시점이라며 화답했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간담회도 개최했다. 교복 가격에 힘들어 하던 학부모들에게는 분명 반가운 소식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교복 문제의 본질이 과연 '가격'일까? 우리는 혹시 가격이라는 경제적 틀에 갇혀, 더 소중한 교육적 가치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장 교복 폐지와 가격 인하라는 해법의 한계

교복 가격이 비정상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정장 교복에 체육복, 생활복을 합치면 정부가 지원해 주는 교복 지원금을 훌쩍 넘는다. 전국 17개 시·도교육청이 현물이나 바우처로 지급하는 교복 지원 정책은, 지원 금액을 인상하면 업체들이 그 금액에 맞춰 교복 가격을 올리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업체 간 담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이미 수차례 적발된 바 있다.

정부가 내놓은 생활복 형태의 ‘저렴한 교복’이나 '교복 협동조합' 같은 대책들은 당장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는 데 기여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교복을 '반드시 입어야 하는 것'으로 전제한 상태에서 나온 단편적인 해법이다. "교복은 필수인데 비싸서 문제니, 싸게 만들면 해결된다"는 논리는 문제의 뿌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진짜 문제는 가격 그 자체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특정 복장을 강요하고 이를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의 경직된 인식과 학교 문화에 있기 때문이다.

2018년 6월 8일,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서 청소년참정권을 요구하는 유권자행동이 '투표소 교복 입장' 기자 회견과 퍼포먼스를 열었다. (사진 제공 = 이윤경) 
2018년 6월 8일, 종로장애인복지관 앞에서 청소년참정권을 요구하는 유권자행동이 '투표소 교복 입장' 기자 회견과 퍼포먼스를 열었다. (사진 제공 = 이윤경) 

교복 자율화가 증명했던 사실들

필자는 1980년대 '교복 자율화' 시대를 지나온 세대다. 당시 학생들은 교복 없이도 학교생활을 무탈하게 이어 갔고, 오히려 개성을 표현하며 자율성을 익혔다. 지금의 기성세대 중 상당수가 그 시절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다시 '학생은 모름지기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획일적인 사고로 회귀했다.

교복을 부활시키며 내세운 명분은 ‘빈부 격차 완화’와 '공동체 의식 함양'이었다. 하지만 현장의 학생들은 이 명분에 냉소적이다. 똑같은 옷을 입는다고 해서 경제적 차이가 가려지지 않는다는 게 이유다. 신발, 가방, 전자 기기 등으로 부는 훨씬 선명하게 드러난다. 공동체 의식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공동체 의식은 똑같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관계에서 싹튼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인 교복은 학생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 교육적 공동체를 구축하는 본질적 도구가 될 수 없다.

또한, 아침마다 셔츠, 넥타이, 조끼, 카디건 등을 갖춰 입느라 분주한 자녀를 보면 ‘그냥 티셔츠에 바지만 입고 가면 훨씬 빠르고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복을 입으면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통제 위한 교복, "입는 것인가, 입히는 것인가"

과거 직장에서 특정 직군이나 성별에만 유니폼을 입혔던 문화를 경험한 적이 있다. 당시 유니폼은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조직의 상징이었다. ‘입었던’이 아닌 ‘입혔던’으로 표현한 이유는 자발적으로 입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학교의 교복 문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재 많은 학교에서 교복 착용 여부는 '벌점'과 '징계'의 기준이 된다.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는 지역조차 교문 앞 복장 단속은 여전하다. 치마 길이부터, 셔츠와 조끼를 챙겨 입고 그 위에 카디건을 반드시 입어야 한다는 식의 레이어드(겹쳐입기) 방식까지 세세하게 규제하고 있는 교복 착용 규정은 학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 순종하는 존재를 길러 내기 위한 규율일 뿐이다.

코로나19 시기, 일부 학교가 체육복 등교를 허용한 사례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체육복을 갈아입을 때 감염이 우려된다’는 특수 상황에서만 '허락'된 편의는, 평상시의 복장 규정이 학생의 편안함보다는 학교의 통제 편의를 우선시해 왔음을 자인한 꼴이다. 학생들은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배울까. ‘규정을 만드는 주체는 학교이며, 학생은 그저 따르는 존재’라는 수동적 복종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내면화하지 않을까.

교복 입고 투표하는 모습. (사진 제공 = 이윤경)<br>
교복 입고 투표하는 모습. (사진 제공 = 이윤경)

'교복 입은 시민'에겐 주체성이 없다

2018년 선거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는 논의가 진행되던 중, 김성태 당시 자유한국당 원내 대표는 "교복 입고 투표하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선거 연령 하향을 반대했다. ‘교복’으로 대표되는 학생에 대해 미성숙하고 판단력이 부족한 존재로 치부한 것이다. 이에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소속 단체들은 사전투표일에 교복을 입고 투표하는 퍼포먼스(설정극)를 펼쳤다.1) 교복을 입은 18세 이상 성인들은 "교복 입고 투표해도 아무 문제 없다"며 참정권 확대를 요구했고 2019년 12월 27일, 공직선거법 개정을 통해 만 18세 선거권과 만 16세 정당 가입으로 청소년 참정권이 확대되었다. 

‘교복 입은 시민’이라는 표현을 정작 당사자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학생을 독립된 권리의 주체인 '시민'으로 온전히 인정하기보다, 굳이 ‘교복 입은’을 덧붙여 여전히 학교와 사회의 통제 아래 있는 '학생 신분'에 가두려는 의도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의 권리는 교복을 입든 안 입든 당연히 누려야 하는 기본권이다.

이젠 ‘교복’을 지울 때가 됐다. 어떤 옷을 입을지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칠 수 있을까. 기본권을 억압하는 통제 위주의 문화 속에서 창의적인 인공지능 인재 강국을 만들겠다는 외침은 공허하다.

협의의 경제 논리를 넘어 광의의 교육 담론으로

교복 정책의 대안은 명확하다. 바로 '자율'이다. 교복을 입고 싶은 학생은 입고, 사복을 선호하는 학생은 사복을 입을 수 있는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미 수락중학교나 숭실중·고등학교처럼 복장 자율화로 학교 현장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사례들이 존재한다.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고, 스마트폰 금지법이 통과되고, 두발 규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학교에서 교복 자율화는 먼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일부 혁신학교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외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분명하게 말해야 한다.

이번 교복 논의가 단순히 ‘가격’이라는 협의의 경제적 틀에서 벗어나, 교육 현장의 본질을 짚어 보는 광의의 교육적 담론으로 확장되길 기대한다. 학교와 사회가 학생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성찰하고, 학생의 주체성과 시민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교복에서 시작된 질문이, 우리 교육 전체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학생은 통제의 대상인가, 변화의 주체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자.

1) “왜 교복 입고 투표 하냐고요?”, <오마이뉴스>, 2018.6.8. 

이윤경

사교육 기업에서 홍보 업무를 담당하다 2011년 여성단체 상근 활동가로 취업한 후 마을공동체 살리기, 차별 반대, 교육개혁 운동 등 활동가의 삶을 살고 있다. 소비자를 설득하는 마케터에서 활동가, 상담가, 조직가로 지나온 시간 속에 언제나 ‘진심’을 다했던 경험들이 자랑이자 자산이다. 공저로 "대한민국 교육트렌드 2024", "한국 교육의 오늘을 읽다", "학교, 회복을 담다", "체벌 거부 선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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