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은 산업 혁명 이후 공장 가동과 기차·선박 운항을 가능하게 한 핵심 연료였습니다. 이후 석유가 이를 대체했지만, 석유 자원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여전히 석탄이 중요한 에너지원이었습니다. 석유를 수입에 의존하던 일본 제국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며 대규모 병력 동원을 단행했고, 그로 인해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 제국은 식민지 조선의 인력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세이 탄광은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꼬나미 해안에 있던 해저 탄광이었다. 사진은 바다에 있는 조세이 탄광의 배기 환풍구 모습. ⓒ장영식
조세이 탄광은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꼬나미 해안에 있던 해저 탄광이었다. 사진은 바다에 있는 조세이 탄광의 배기 환풍구 모습. ⓒ장영식

초기에는 기업이 할당받은 지역에서 노동자를 모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발적 모집은 어려워졌습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지휘 아래 관청이 개입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결국 국가가 직접 강제 징용에 나섰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기업 모집 또는 관 알선이었을 뿐 강제성은 없었다.”라며 책임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 주장입니다. 일본의 대표적 역사 연구 단체인 ‘역사학연구회’는 2023년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성명에서 “모집 방식은 3단계였으나 모든 과정에 조선총독부와 경찰이 관여했으며, 노동자들은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엄중한 감시 속에서 가혹하고 위험한 노동을 강요받았고 민족 차별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이미 연구로 분명해졌다.”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일본 정부가 이러한 연구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조세이 탄광 수몰 참사 84주기를 맞아 희생자 추도 집회에서 소프라노 가수 사다야마 치에 씨가 아리랑과 고향의 봄 등을 부르며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도했다. ⓒ장영식<br>
조세이 탄광 수몰 참사 84주기를 맞아 희생자 추도 집회에서 소프라노 가수 사다야마 치에 씨가 아리랑과 고향의 봄 등을 부르며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추도했다. ⓒ장영식

조세이(장생) 탄광은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도코나미 해안에 위치한 해저 탄광이었습니다. 조선인 노동자가 많아 ‘조선 탄광’으로도 불렸습니다. 대규모 탄광은 아니었지만, 야마구치현에서 조선인을 가장 많이 동원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른 탄광의 조선인 비율이 10% 내외였던 반면, 조세이 탄광은 무려 75%가 조선인이었습니다. 노동 조건이 특히 열악하고 위험해 일본인 노동자들조차 기피하던 곳이었으며, 그만큼 강제로 동원된 조선인이 많았습니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약 1162명이 이곳에 투입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탄광은 본래 사고 위험이 높은 작업장이지만, 해저 탄광은 위험성이 더욱 컸습니다. 조세이 탄광은 수심 30미터 전후에서 작업이 이뤄졌고, 노동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작업 중 바다 위로 배가 지나갈 때면 “통통통통” 하는 소리가 갱도 안까지 들렸다고 합니다. 피해자들은 “너무 무서웠다”라며 당시의 공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율려춤 창안자 이귀선 씨가 모든 사람이 상여가 되는 생명의 춤, 우주의 춤으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공연을 했다. 이귀선 씨는
율려춤 창안자 이귀선 씨가 모든 사람이 상여가 되는 생명의 춤, 우주의 춤으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공연을 했다. 이귀선 씨는 "희생자들의 영혼들이 오죽했으면 나를 불렀겠느냐"라며 "조선인뿐만 아니라 183명의 모든 유해를 다 올려야 된다는 의미로 춤을 췄다."라고 말했다. ⓒ장영식

1942년 2월 3일, 조세이 탄광에서는 바닷물이 갱도로 급속히 유입되는 대형 수몰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바다 밑에서 작업 중이던 노동자 183명이 탈출하지 못했고, 이 가운데 136명(약 74%)이 조선인이었습니다. 희생자 중 75명은 대구·경북 출신이었으며, 5명은 북한 출신이었습니다. 사고 직후 추가 피해를 막는다는 이유로 갱구는 곧바로 봉쇄됐고, 사고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책임자 역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조선에 있던 유족들에게는 사고 사실조차 제대로 통보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보다 석탄이 우선이었던 것입니다.

1945년 패전과 함께 조세이 탄광은 폐광됐고, 이 수몰 사고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습니다. 전환점은 1976년, 우베 지역의 향토사학자 야마구치 다케노부 씨가 '우베 지방사 연구'에서 조선인 희생자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리면서 찾아왔습니다. 그의 문제 제기 이후 1991년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회’(이하 새기는 회)를 결성했습니다. 이 단체는 선언문을 통해 “희생자들의 이름과 왜 아직도 많은 조선인이 바다 밑에 잠들어 있는지를 사죄의 마음을 담아 역사에 새기는 것은 지금을 사는 일본인의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종일 씨가 자신의 시로 작곡한 '장생바다의 눈물'을 부르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장영식 
이종일 씨가 자신의 시로 작곡한 '장생바다의 눈물'을 부르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장영식 

‘새기는 회’는 수몰자 명부를 찾아내 희생자 주소로 118통의 편지를 보냈고, 그중 17통의 답장이 한국에서 도착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90년 한국 유족들이 ‘일본 장생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1993년부터 일본 시민단체는 매년 2월 한국 유족을 초청해 추도식을 열어 왔으며, 2013년에는 ‘강제 연행 한국·조선인’이라는 문구를 명시한 추도비를 건립했습니다. 일본에서 ‘강제 연행’을 명확히 표기한 사례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당시 명부는 창씨개명된 이름으로 작성돼 있었지만, ‘새기는 회’는 “이름을 되찾아 주자”는 목표 아래 한 사람 한 사람의 본명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136명 중 5명을 제외한 모든 희생자의 한국 이름을 밝혀냈습니다.

도꼬나미 해안에서 만난 최금석(90) 씨와 김점태(68) 씨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골이라도 고향으로 모시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안고 경북 칠곡에서 왔다고 한다. 최금석 씨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네 살 때에 아버지가 경북 군위에서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기억했다. 어머니조차 일찍 세상을 떠나 고아처럼 자랐다는 최금석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바다 위에 떠 있는 환풍구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장영식
도꼬나미 해안에서 만난 최금석(90) 씨와 김점태(68) 씨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유골이라도 고향으로 모시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안고 경북 칠곡에서 왔다고 한다. 최금석 씨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네 살 때에 아버지가 경북 군위에서 일본으로 끌려갔다고 기억했다. 어머니조차 일찍 세상을 떠나 고아처럼 자랐다는 최금석 씨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바다 위에 떠 있는 환풍구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장영식

연대 활동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한국 유족들은 “추도비도 중요하지만, 바다 밑에 계신 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시고 싶다”라는 간절한 바람을 전했습니다. 이에 ‘새기는 회’는 유골 발굴을 목표로 설정하고, “유골은 단순한 뼈가 아니라 원통한 죽음의 역사를 증언하는 존재이며, 이를 세상 밖으로 꺼내 희생자의 존엄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고 결의했습니다. 이들은 2018년부터 일본 정부와, 2019년부터는 한국 정부와 교섭을 진행했습니다. 2024년 2월 3일 추도식에서는 “시민의 힘으로 매몰된 갱도를 열어 유골의 존재를 확인하자”라고 결정했고, 같은 해 7월부터 발굴과 잠수 조사를 위한 모금이 시작됐습니다. 9월 25일 노동자 출입구가 발굴됐고, 2025년 8월 25-26일 한국인 잠수사에 의해 마침내 유골 네 점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어 2026년 2월 6일, 또 한 점의 검은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갑작스런 대만 잠수사의 사고 소식으로 추도회 현장은 긴 침묵이 이어졌다. 갱도 입구에서 열리기로 했던 2부 추모식은 취소됐다.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대만 잠수사의 안녕을 기원했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대만 가족들의 정중한 요청으로 그의 잠수 전의 마지막 모습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자원봉사로 유골 발굴을 위해 참여했던 잠수사들의 분투를 기억하며 안타깝고 슬픈 소식에 옷깃을 여민다. ⓒ장영식
갑작스런 대만 잠수사의 사고 소식으로 추도회 현장은 긴 침묵이 이어졌다. 갱도 입구에서 열리기로 했던 2부 추모식은 취소됐다.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대만 잠수사의 안녕을 기원했지만,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대만 가족들의 정중한 요청으로 그의 잠수 전의 마지막 모습은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자원봉사로 유골 발굴을 위해 참여했던 잠수사들의 분투를 기억하며 안타깝고 슬픈 소식에 옷깃을 여민다. ⓒ장영식

그러나 2월 7일 발굴 작업 도중 자원봉사로 참여한 대만 국적의 잠수사 웨이 수(Wei Hsu) 씨가 잠수 중 경련을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이틀 전 기자 회견에서 “매우 위험한 잠수가 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었습니다. 이 사고로 유골 발굴과 모든 추도 행사는 전면 중단됐습니다.

조세이 탄광 참사 84주기를 앞두고 일본·대만·핀란드·인도네시아·필리핀 등에서 온 전문 잠수사 6명이 2월 11일까지 작업을 이어 갈 예정이었으나, 이번 사고로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현지에 모인 부산·대구 지역 중심의 ‘장생탄광 희생자 귀향추진단’ 80여 명은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한편, 웨이 수 씨의 죽음을 깊은 애도로 기렸습니다.

한국에서는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시민 80여 명이 '장생탄광 희생자 귀향추진단'으로 참여했다. 올해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국회의원들도 참석했다. ⓒ장영식">
한국에서는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시민 80여 명이 '장생탄광 희생자 귀향추진단'으로 참여했다. 올해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의 대표들이 참석했으며, 국회의원들도 참석했다. ⓒ장영식

‘검은 다이아몬드’라 불렸던 석탄은 결국 또 하나의 비극으로 남았습니다. 2월 7일, 조세이 탄광의 배기 환풍구에는 거센 검은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검은 바다 속에 잠든 희생자들과 유골 발굴을 위해 목숨을 바친 웨이 수 씨의 명복을 빕니다. 동시에, 유골 발굴에 무관심으로 일관해 온 일본 정부의 책임 또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희생자들을 고향으로 모시기 위한 연대의 움직임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도비에는 창씨개명이 아니라 한국 이름이 새겨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국 이름을 찾기 위한 일본 시민단체의 수고와 헌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장영식
추도비에는 창씨개명이 아니라 한국 이름이 새겨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국 이름을 찾기 위한 일본 시민단체의 수고와 헌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장영식

* 이 글은 “장생탄광 희생자 귀향추진단” 6차 방문 자료집에서 도움 받았음을 밝혀 둡니다.

장영식(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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