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폭력에 의한 타살’ 인정 후 첫 문집, 서울대 가톨릭 동문들 참여
의문사 40여 년 만에 ‘진실의 기록’, 군부 독재의 어둠 걷어낸 신앙의 증언

1980년대 군부 독재 시절, 이른바 ‘강제 징집 및 녹화 사업’의 희생자로 차가운 땅에 묻혀야 했던 한 청년의 삶과 신앙이 40여 년 만에 다시 조명된다. 지난 3일 출간한 <한희철 귀리노 열사 추모문집: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한희철 열사 추모 단체 연합과 서울대학교 가톨릭 졸업생 공동체(이하 졸톨릭)가 함께 뜻을 모아 펴낸 기록물이다.

서울대학교 공대에 재학 중이던 한희철 열사(귀리노)는 학생 운동과 가톨릭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다 1983년 강제 징집됐다. 군 복무 중이던 그는 같은 해 12월, 학생 운동가들을 강제 입대시켜 프락치(첩자) 활동을 강요하거나 사상을 전향시키려 했던 '녹화 사업'의 압박 속에서 숨졌다. 당시 군 당국은 사인을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가족과 동료들은 국가 권력에 희생되었음을 주장하며 진상 규명을 위해 싸워 왔다. 이번 추모문집은 긴 세월의 아픔과 열사가 남긴 신앙의 고백을 한데 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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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 귀리노 열사 추모문집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책 표지. (표지 제공 = 이성훈)

‘자살’에서 ‘국가 폭력에 의한 타살’로... 진실이 틔운 발간의 불씨

이번 문집 발간의 결정적 계기는 2024년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의 결정이었다. 진화위는 한희철 열사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강제 징집 이후 보안사가 가한 가혹 행위와 프락치 활동 강요 등 국가 폭력으로 발생한 타살이었다고 공식 인정했다.

총괄 편집을 맡은 이성훈 씨(안셀모, 현 팍스크리스티 코리아 상임 대표)는 발간사에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희철 선배가 비로소 ‘억울한 죽음’의 멍에를 벗고 우리 곁으로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며, “이 책은 그가 남긴 숭고한 정신을 기록해, 다시는 이 땅에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엮었다”고 전했다.

1983년 당시 서울대 가톨릭 학생회(울톨릭) 회장이었던 그는 “만약 2024년 12월의 불법 계엄 시도가 성공했다면 이 추모문집 역시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며, “한희철과 같은 수많은 민주 열사들이 오늘의 산 사람들을 살렸다”고 고백했다.

2024년 비상 계엄 사건은 역설적으로 이 문집이 왜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인지, 과거 국가 폭력의 희생자들이 오늘날 사회를 지탱하는 큰 기둥이었다는 점을 새삼 확인케 했다.

“어머니, 하느님도 저를 낳아 주셨습니다”고뇌와 투신의 기록

문집에는 한희철 열사가 남긴 편지와 일기, 그를 기억하는 지인들의 추모 글이 빼곡히 담겼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대목은 열사가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다.

중이염으로 고통받으며 눈물로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어머니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 에미나 동생들보다 더 귀중한 것이냐”고 물었다. 이에 열사는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고, 그것을 위해 바쳐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낳아 주셨지만, 하느님도 저를 낳아 주셨고, 제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글귀는 사회운동가를 넘어, 복음적 가치에 따라 자신의 삶을 기꺼이 봉헌하고자 했던 ‘신앙인 한희철’의 면모를 보여 준다.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추모문집에 실린 한희철 열사 소개 지면. (자료 제공 = 이성훈)<br>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 추모문집에 실린 한희철 열사 소개 지면. (자료 제공 = 이성훈)

“그는 죽지 않고 우리 가슴 속에 살아 있다” 이어지는 추모의 목소리

이 책에는 1980년대 서울대교구에서 대학생 사목을 담당했던 강우일 주교(제주교구 전 교구장)의 추모사도 실려 있다.

강 주교는 “젊은이들이 양심에 따라 시대의 고통에 응답하던 시절, 한희철은 그리스도인의 양심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들은 단순한 사회운동가가 아니라, 불의한 세상 속에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려 했던 신앙인이었다”며, “국가 폭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던 그의 삶은 오늘의 교회에 묻는다. 우리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서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전합수 신부(가브리엘, 현 수원교구 북여주 성당 주임)의 추모사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 한희철 열사의 울톨릭 후배인 그는 1997년부터 2004년까지 매년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 미사를 봉헌해 왔다.

전 신부는 “한희철의 죽음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반복될 수 있는 구조적 죄의 결과”라며, “그를 기억하는 일은 복수나 증오가 아니라 회개와 책임, 그리고 화해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가톨릭 사회교리가 말하는 ‘기억의 윤리’와 깊이 맞닿아 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들의 응답

서울대 가톨릭 졸업생 공동체와 한희철 열사 추모 단체 연합이 함께 펴낸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상처 위에 놓인 신앙적 성찰의 기록이다. 아울러 교회가 인권과 정의의 문제 앞에서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지를 묻는 양심의 문서다. 한 청년의 삶을 따라가며, 민주주의와 인권이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담담히 증언한다.

다시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 전쟁과 폭력, 혐오와 배제가 일상이 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의 존엄은 쉽게 뒤로 밀려난다. 이런 시대에 이 책은 묻는다. “당신은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그리고 어떤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는가?”

이 책은 현재 온라인 교보문고알라딘에서 주문할 수 있으며, 3월 초부터는 교보문고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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