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오늘은 여기까지’ 칼럼을 쓴 후로 7년이 지났다.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가 갑자기 연재를 이어 가려니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다. 그때의 독자분들은 여전히 안녕하신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도 궁금하고 반가운 기분이다.

지난 7년 동안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먼저 20대에서 30대가 되었다. 모르는 어린이들이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게 훨씬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뜻이다. 처음엔 더 이상 ‘언니’가 아니란 사실에 슬픈 순간도 잠깐 있었지만, 한국에서 때로 멸칭으로 쓰이는 저 호칭도 어느덧 나의 정체성 중 일부가 되었다.

그다음으로 큰 변화는, 한국이 아니라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19년에 서강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로마에서 신학교 학부에 입학하는 믿기 힘든 일을 저질러 버렸고, 올해로 벌써 로마살이 7년 차가 되었다. 그간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은 차차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감사하게도 연재를 제안받고, 새해를 맞이하며 첫 이야기를 무엇으로 시작하면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피에트로를 떠올렸다.

피에트로는 내가 사는 기숙사 앞 성당 대문에 아침마다 앉아 있는 사람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노숙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멀끔한 차림으로, 언제 마신 술 때문인지 조금 불콰해진 얼굴을 하고는 항상 출근하듯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바라볼 스마트폰도 없이, 그는 그저 주변을 바라보거나 지나가는 이웃들과 담소를 나누고, 점심때쯤 퇴근하듯 사라진다.

그는 매일 아침 성당 문간에 앉아서 등교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러면 나도 때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피에트로와 식재료를 나누곤 했다. 어떤 친구는 피에트로에게 커피를 얻어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어느 겨울엔 피에트로가 몇 없는 세간 살림을 몽땅 도둑맞는 바람에 기숙사 친구들이 돈을 모아 침낭 등을 사다 준 일도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군가 피에트로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는 하루 나가 보더니 자기와 맞지 않는다고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 사람은 피에트로가 배가 불렀다, 의지가 없다고 투덜댔다. 그런데 그건 피에트로 마음 아닌가? 싶다가도 그가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충분히’ 노력하는 게 역시 그에게도 좋은 걸까? 싶어져서 아침마다 피에트로를 바라보는 내 심정은 괜스레 복잡해졌다.

그가 매일 아침 그 자리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성 관점에서 그가 생산해 내는 ‘가치’라곤 없어 보인다. 도리어 사람들에게 도움받는 처지다. 어떠한 재화나 서비스도 생산하지 않고, 시장 경제에 아무런 이윤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 같다. 누군가에게 그는 그저 게으른 사람일 것이다. 혹은 사지가 멀쩡한데도 일하지 않는 사람, 실패한 사람,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 더 심한 말로는 별 쓸모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집을 나서 피에트로에게 인사를 하려고 고개 돌렸는데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었다. 며칠째 그런 날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 있나? 어디가 아픈가? 생각하며 걷다가, 그가 없는 자리를 보고서야 문득 깨달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음을. 마치 하느님이 자신을 그저 “있는 나”라고 명명하듯, 피에트로 역시도 그저 존재함으로써 존재하고 있었음을. 수년 동안 그를 바라보고서야 깨달았다. 그는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매일 아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그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것을.

매일 아침 피에트로가 앉아있는 성 알폰소 성당 앞. 이탈리아에서는 동네 이웃과 노숙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알고 안부를 나누는 일이 비교적 흔한 일이다.
매일 아침 피에트로가 앉아 있는 성 알폰소 성당 앞. 이탈리아에서는 동네 이웃과 노숙인들이 서로의 이름을 알고 안부를 나누는 일이 비교적 흔한 일이다. ©박유형

요상한 깨달음이었다. ‘피에트로는 존재함으로써 존재했던 거구나...’라는 심상인지 문장인지 모를 것이 마음속에 두둥실 떠올랐지만 정확히 설명하기란 어려웠다. 정말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1인분을 해내는 사람이 되려고 다들 열심히 노력하며 사는데, 그저 존재함으로 존재한다는 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그러다 문득 예전에 읽은 인터뷰를 떠올렸다.

“당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박경석 상임 대표가 단상에 나와 연설했어요. 우리가 종로에서 차선을 가로막고 시위를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계속 짜증을 냈죠. 몇몇 사람들은 엄청 욕을 하고 째려보기도 했죠. 그런 와중에 박 대표가 ‘지난 20년 동안 그렇게 문제를 제기하고 싸워 왔는데 왜 저들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지 아십니까’라며 청중에게 물었어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직접 답을 했어요. ‘그것은 저희가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세 번 아주 천천히 외쳤어요. 그 순간 놀랐던 게 그 집회에 앉아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 행인도,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도 매우 진지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우리와 저들이라는 구분이 무너지는 순간을 짧게나마 느꼈어요. (...) 우리가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 간에 결국에는 그 쓸모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잖아요.”1)

첫 시작을 어떤 글로 시작할지 고민하다 이 이야기들이 떠오른 건, 요즘 그 누구보다도 쓸모를 찾다가 존재하는 법을 잊어버린 나 자신 때문일 것이다. 산만한 스마트폰 화면 너머에 정신을 빼앗긴 채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걱정하다가 하루가 간다. 더 생산성 있는 하루를 보내려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이에 그저 존재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다. 어쩌면 사람들이, 혹은 내가, 피에트로를 바라봤던 시선처럼 세상이 정한 ‘유용함’만을 충족하려 골몰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인간의 관심마저도 돈이 되는 세상에서, 나는 조건이 붙을 때야 잠깐씩 존재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소비하는 존재로 잠깐, 오늘 하루 ‘갓생’(부지런하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뜻함)을 살았을 때에야 잠깐.

피에트로를 통해 불타는 떨기나무를 떠올린 건 아마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존재 양식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한다면, 우리도 그저 “있는 나”가 되어야 한다. ‘쓸모로서 존재하는 나’, ‘무엇을 해내야만 존재하는 나’, 그래야만 ‘의미 있는 나’가 아니라, 그저 창조되어 존재하는 나로서. 이미 하느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나로서 사는 법을 보여 준다. 나무가 사는 법은 최선을 다해 나무가 되는 것이고, 새가 사는 법은 최선을 다해 새로서 사는 것이다.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까.

연재를 시작하며, 올해는 그저 존재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저 창조된 피조물로서 존재하는 일에 전념해 보겠다고. 그리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조건 없이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한 사람으로 바라보겠다고. 하느님이 그저 우리를 바라보시듯이.

1) <경향신문>, [전문]‘약자’ ‘카르텔’ 호명에 담긴 윤석열 정권의 분리통치···조문영 “빈곤은 이벤트·브랜드화 아니라 철폐·종식 대상”, 2024.1.4.

박유형

로마에서 신학하는 여성 평신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과 학부와 기초신학 석사를 마치고, ‘돌봄’을 주제로 기초신학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능력을 기르려 오늘도 타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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