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세상의 빛’인가?

교회는 스스로를 ‘세상의 빛’이라 부른다. 그런데, 세상도 오늘의 교회를 빛으로 여길까? 사회적·생태적 위기의 짙은 어둠 속에서 세상은 교회를 등불 삼아 구원의 길을 찾고 있을까? 이런 물음은 그리스도인을 깊은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어둠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교회를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상식이 되어 간다. 지난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의 조사는 이를 여실히 보여 준다. 개신교인 중 개신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높다’고 응답한 비율은 43.9퍼센트였는데 반해, ‘낮다’고 응답한 비율은 50.5퍼센트로 더 많았다. 개신교인들조차도 교회가 사회의 불신을 받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비개신교인의 개신교 평가는 더 혹독하다. 개신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높은 편이라고 보는 비개신교인은 27퍼센트에 그친 반면, 낮은 편이라고 보는 응답자 비율은 무려 두 배가 넘는 59.4퍼센트였다. 예수는 “여러분 안의 빛이 어둠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루카 복음 11,35)라고 하셨는데, 마치 오늘의 교회를 향한 경고처럼 들린다.

종교에 대한 사회적 불신은 개신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개신교가 ‘평균 점수’를 깎아 먹긴 하지만, 종교 전체의 사회적 신뢰도도 계속 떨어지는 추세다. 특히 사회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종교를 향한 불신은 더 커진다. 전통 사회에서는 위기가 곧 종교의 기회였다는 걸 상기하면, 매우 우려스러운 변화다. 여기엔, 현대인들이 종교에 덜 의지하고 과학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게 한몫했다. 아프면 교회나 성당, 절 대신 병원부터 가는 게 상식이 되었고, 다른 문제들도 기도보다는 기술로 풀려 한다. 한마디로 종교의 ‘쓸모’가 줄어든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종교가 사회적 공감 능력과 공공성을 잃어버린 것이 사회적 신뢰 상실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전 지구적 위기였던 코로나19 대유행 때 종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한 원인도 대면 예배를 고집한 일부 개신교 교회와 종파의 반사회적 행동이었다. 다행히 다른 종교들은 큰 사고는 안 치고 기본은 지켰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한 큰 사랑을 보여 준 것도 아니었다. 결국, 종교는 ‘시민의 위기’보다는 ‘종교의 위기’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세상의 통념으로 굳어졌다.

이렇게 종교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니, 종교의 교세 확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실제로 21세기 들어 종교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선 비종교인 비율(56.1퍼센트)이 종교인 비율(43.9퍼센트)을 넘어섰다. 인구주택총조사는 10년 주기로 종교 관련 조사를 하는데, 아마도 2025년 올해 조사에서는 종교 인구 비율이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설령 종교 인구 비율이 유지 또는 증가로 나타난다고 해도 종교들로서는 안심할 일이 아니다. 종교인들의 탈종교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명목상으로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실제 종교 생활은 하지 않는 종교인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소위 ‘가나안 신자’(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는데, 2023년 한국목회자협의회의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인 중 29퍼센트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슷하게, 2024년 조사에서도 개신교인 중 30.9퍼센트가 출석 교회가 없다고 답했다. 개신교인 10명 중 3명이 가나안 신자인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변화는 사회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한국 교회는 내부의 위기를 외부의 타자—공산주의자, 동성애자, 무슬림 등—에 대한 적대로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한국 개신교의 극우화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제는 한국 교회가 보이고 있는 극단적 반공, 소수자 혐오, 종교적 배타주의, 극우주의가 다시 교회에 대한 사회적 불신과 반감을 키운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악순환 속에서 교회는 더욱 빛을 잃고 세상의 어둠으로 전락해 간다.

교회가, 종교가 다시 세상의 빛이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답을 찾으려면 우선 세상이 종교에 무엇을 기대하는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지난해 기사연의 조사에 따르면, 비개신교인이 종교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겸손한 태도’다.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교회는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종교는 ‘종교보다 더 종교적인’ 세상 사람들로부터 겸손히 배워야 하는 것이다.

미리엘 주교와 혁명가 G의 대화

종교의 겸손을 잘 보여 주는 것이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중 미리엘 주교와 혁명가 G의 대화다. 어느 날, 미리엘 주교는 혁명가 G가 죽어 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을 방문한다. ‘의인’으로 추앙받는 주교였기에 G의 죽음을 못 본 척할 수 없었지만, 실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G는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 처형 결정을 내린 국민의회 의원 중 하나였고, 왕당파였던 주교 자신이 그 혁명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주교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 사제인 자신의 의무라고 여기며 G를 찾았다. 하지만 막상 G를 만나니 반감이 일어났다. 그래서 미리엘은 위로 대신 G와 논쟁에 가까운 대화를 한다.

미리엘 주교는 혁명은 “분노가 끼어든 파괴”였다며 비판한다. 이에 G는 “권리의 분노는 진보의 한 요소”이며, 비록 불완전했다고 할지라도 프랑스 혁명은 “인류의 존엄함을 선포하는 축성식”이었다고 반박한다. 주교는 비판의 날을 더 세운다. 그는 국민의회가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를 공개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10살 소년이었던 루이 17세마저 감옥에서 죽게 한 혁명의 잔인함을 규탄한다. G는 루이 17세를 위해 흘린 주교의 눈물을 존중하면서도, “우리의 눈물을 루이 17세 이전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교님께서 저와 함께 백성들의 어린것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시면, 저 또한 당신과 함께 국왕들의 자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미리엘은 항변한다. “저는 모든 이를 위하여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G가 목소리를 높여 말한다. “대등하게! 그리고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야 한다면, 백성들 쪽으로 기울어야 합니다. 그들이 더 오래전부터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G는 압제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연민과 진보에 대한 바람을 열정적으로 토로한다. 그리고 미리엘에게 묻는다. “이제 제 나이 여든여섯이며, 곧 죽을 것입니다. [주교님은] 저에게 무엇을 청하러 오셨습니까?” 그 순간, 노혁명가에게, 어쩌면 주교 자신에게도 충격적이었을 사건이 일어난다. 미리엘이 “당신이 내려 주실 축복을!”이라고 말하고는, G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리고 주교가 머리를 들었을 때, 혁명가가 엄숙한 모습으로 숨을 거둔 것을 보았다. 마치 세속적 혁명가 G가 사제가 되고 경건한 주교 미리엘이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레 미제라블"에서 미리엘 주교의 삶과 신앙을 이야기하는 장의 제목은 ‘의인’(A Just Man)이다. 어쩌면 이미 의인으로 불렸던 미리엘이 진정한 의인이 된 순간은 그가 죄인이라 여기며 불편해 하고 부정했던 G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일 것이다. 미리엘 주교는 그날 G와 있었던 일에 대해 침묵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레 미제라블’, 곧 ‘비참한 자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더욱 심화되고 구체되었다. 이 사건 이후, 드디어 우리가 잘 아는 장 발장이 미리엘 주교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광장의 기적

미리엘이 ‘교회’를 상징하고 G가 ‘세상’을 상징한다면, "레 미제라블"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교회가 겸손히 세상에 무릎을 꿇고 연민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회적 연민과 연대를 지난 탄핵 과정에서 목격했다. 일부 개신교 집단이 극우적 언행으로 타자를 적대하고 악마화할 때, 시민은 자신의 울타리를 허물고 타자를 환대했다. 혹한의 동짓날이었던 12월 21일, 전국농민회총연맹 ‘전봉준 투쟁단’ 트랙터 시위대가 경찰차 벽에 막혀 남태령에 고립되었을 때,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소식을 접한 2030 여성과 청년, 성소수자, 비정규직 노동자 등, 수천 명이 달려가 무박2일 투쟁 끝에 길을 열었다. 사람들은 이를 ‘남태령의 기적’이라 불렀다.

서로가 서로에게 열리는 기적의 사건은 계속되었다. 자신에게서 새어 나오는 연민과 연대의 빛에 매료된 사람들은, 며칠 뒤 크리스마스이브 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안국역 시위에 참여해 ‘다시 만난 세계’를 노래했다. 성탄절 다음 날,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해고 노동자들에게 물 공급이 끊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구미 공장에는 전국에서 보내온 생수 수천 통이 쌓였다. 마치 성탄 선물처럼. 인권 운동가 박래군은 이를 ‘남태령의 기적’에 이은 ‘생수 기적’이라고 불렀다. ‘기적’이라는 종교적 표현이 자연스러울 만큼 광장의 사람들은 자기 초월적이었다.

또한 광장을 밝힌 시민의 빛은 그동안 사회적으로 가려졌던 존재, 보이지 않았던 소수자들을 보게 했다. 일상이 ‘계엄 상태’였던 소수자들은 용기 있게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며 목소리를 냈고, 시민은 그들을 환대하며 연대했다. 형형색색의 응원봉 불빛처럼 각기 다른 존재들이 연대의 광장에서 만나 진정한 의미의 ‘사회’를 이루어 낸 것이다. 기적 같은 사회적 유대를 이루어 낸 광장의 시민들을 예수가 보셨다면, 분명 기뻐하며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입니다”(마태 5,14) 그 세상의 빛 아래 겸손히 무릎을 꿇고 배울 때, 비로소 교회의 어둠이 걷히기 시작할 것이다.

정경일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를 비교 연구했으며 사회적 영성을 탐구하고 있다.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도학사 원장으로 일하면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4.16생명안전공원예배팀, 한국민중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픔 넘어 : 고통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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