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하 기사연)이 매년 정기 수행하는 한국 개신교인의 사회 인식 조사와 분석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어떤 때는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을 함께 비교 조사하고, 어떤 때는 개신교인만을 한정하여 심층 조사하기도 한다. 매번 기본 조사와 더불어 청년 문제나 정치적 감정 같은 특정 주제를 병행 조사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조사와 연구가 축적되면서 몇 가지 일관된 경향이 도출되었다.

우선 정치와 경제 현안 관련해서는 개신교인과 비개신교인 사이에 뚜렷한 성향이나 인식 차이가 거의 없었다.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양극화는 교회 내부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며,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지닌 물질주의적 욕망 또한 개신교인에게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그런데 유독 개신교인의 차이가 현저하게 관찰되는 영역이 있다. 동성애, 성소수자, 차별금지법과 관련된 사안에서는, 개신교인의 부정적 인식과 태도가 비개신교인보다 크게 나타난다.

시민 사회와 비교할 때 종교가 상대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특별히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주목할 점은 종교 간 사회 인식의 차이다. 종교들 중에서도 개신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 보수성과 배타성이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동일한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도 개신교인과 가톨릭 신자 사이에는 인식 차이가 보인다. 예를 들면, 2024년 조사 결과 성소수자를 축복한 성직자에 대한 처벌을 정당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개신교인 48.3퍼센트, 가톨릭 신자 37.7퍼센트, 두 집단 간 10.6퍼센트포인트 차이가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프란치스코 전 교황이 사목 차원에서 사제들의 동성 커플 축복을 허용한 것과 일정 부분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가톨릭 역시 동성애와 관련해서는 부정적 가르침과 제도를 고수하고 있다. 최근 교황 레오 14세는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프란치스코 전 교황의 원칙을 공유한다면서도, 동성혼 인정과 같은 교리 개혁 가능성은 명확히 부정했다. 성소수자 축복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관용적 태도는 교리적·신학적·제도적 차원보다는 사목적 차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가톨릭교회가 사목적 차원에서 변화를 보인다는 점은 인권 향상의 흐름 속에서 매우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향후 교리·신학·제도 변화의 전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사연 개신교인 인식 조사에서 집중한 주제는 한국 교회 내 극우화의 전개 양상이었다. 특히 주목한 것은 개신교 내 극우 성향 교인의 비율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가 극우주의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회적 통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사 결과는 통념과 달랐다. 지난 5월 28일 발표된 연세대 복지국가연구센터와 한국리서치의 '수면 위로 떠오른 극우 : 한국 사회 극우의 현주소' 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 전체의 극우 성향 비율은 21퍼센트였는데, 같은 설문을 사용한 이번 기사연 조사에서도 개신교인 중 극우 비율은 21.8퍼센트로 거의 동일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를 받고 연구팀은 복합적인 감정을 경험했다. 한편으로는, 극우 성향 개신교인 비율이 사회 전체 평균과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이는 개신교가 정치적으로 사회 평균보다 더 극우적 성향일 것이라는 우려 섞인 예상과 상반되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인 10명 중 약 2명이 극우 성향을 보인다는 것 자체는 낮은 수치가 아니지만, 그래도 개신교 집단이 사회 평균보다 더 극우적이지 않다는 점이 다행스러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화해의 가치를 강조하는 개신교라면 사회 평균보다 극우 성향이 낮아야 마땅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낀다는 게 오히려 자괴감을 갖게 했다. 물론 개신교인은 신앙인이면서 시민이기에, 정치적 선택과 행동에서 신앙 외에도 다양한 기준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사회가 극단적으로 분열하고 갈등할 때, 교회가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당위적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실의 한국 교회에 대한 그런 기대가 과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림 생성 = 챗지피티)
(그림 생성 = 챗지피티)

사회 전체와 교회 내 극우 성향 비율이 유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만은 없다. 일부 극우 개신교 집단이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지만, 12·3 내란 사태 이후 광장의 극우 정치 중심에는 이른바 ‘광화문파’와 ‘여의도파’ 등, 특정 극우 개신교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제적·국내적 정치·경제 조건을 볼 때, 한국의 극우 세력은 쇠퇴가 아닌 발흥 단계에 있으므로 이를 경시할 수 없다. 게다가 미국의 ‘기독교 민족주의’가 파시스트적 성격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 운동이 종교적 지지 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 극우 정치와 개신교의 결속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한다.

이와 같은 극우주의와 그리스도교의 연관성은 교회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제기한다. 정치와 종교, 사회와 교회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세속 정치나 사회와 구별되는 교회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인가? 가톨릭 신학자 메리 도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시대는 사회 내 집단 간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다. 더 넓은 사회에 대한 헌신을 통해 구별된 정체성을 유지하는 대안 공동체의 증언은, 이 시대에 만연한 정체성의 울타리 안으로 철수하는 교회보다 더 반문화적인 증언이다. 교회는 지금 집단을 서로 대립시킴으로써 사회를 분열시키는 부족화(tribalization)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할 때에만 진정으로 구별될 수 있다.”

교회가 자신의 고유성을 사회와 구별해 드러내는 길은 대립과 분열을 조장하는 부족적 극우 정치, 증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라는 의미다.

도크의 주장을 더 적극 확장하면, 교회는 차별이 아닌 평등을, 혐오가 아닌 사랑을 통해 자신의 구별된 고유성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교회의 목적이 단지 타자를 해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가 교회에 기대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지는 못해도 해치지는 말아 달라.”는 현실에서 너무 이상적인 바람으로 여겨질 수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르치는 핵심은 분명히 이웃 사랑-심지어 원수 사랑-이다.

세속 사회에도 ‘사마리아인법’이라는 게 있다. 나라에 따라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다가 생긴 문제에 책임을 묻지 않기도 하고, 도움을 줄 수 있었는데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기도 하는 법이다. 법 차원에서는 시민의 책임 면제나 추궁의 정당성을 놓고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종교 차원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세속적 복음’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 심판 비유에서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를 돌보지 않은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게 되지 않았는가!

교회는 기존 사회와 유사한 또 하나의 사회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되는,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조 사회’다. 교회는 하느님나라를 예시하고 가시화하는 성사적(sacramental) 상징이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하느님나라를 보게 된다. 교회와 사회의 대조가 뚜렷할수록 하느님나라는 더욱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교회가 사회보다 더 나은 존재일 때, 타자를 위한 존재일 때 비로소 구별된 고유성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교회가 사회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다행이 아니라 한국 사회와 교회의 큰 불행일지도 모른다.

정경일

해방신학과 참여불교를 비교 연구했으며 사회적 영성을 탐구하고 있다.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심도학사 원장으로 일하면서 차별과 혐오 없는 평등세상을 바라는 그리스도인 네트워크, 4.16생명안전공원예배팀, 한국민중신학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지금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픔 넘어 : 고통의 인문학"(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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