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세 번째 월요일 저녁이 되면 나는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성소수자부모모임의 사무실에서 미사를 준비한다. 간이 테이블 두 개를 붙이고 그 위에 제대를 차린 다음, 제대 중심으로 의자를 둥글게 배치하면 인권단체 사무실은 작은 공동체가 미사를 봉헌할 그럴듯한 공간이 된다. 하나, 둘, 사람들이 도착할 때마다 반가운 인사가 오가고, 감미로운 기타 연주와 함께 입당 성가가 울려 퍼지면 조금 특별한 미사가 시작된다. 제대 위에 작은 무지개 깃발이 놓여 있고, 미사에 참석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의 손목에 무지개 리본이 묶여 있고, 미사가 봉헌되는 동안 ‘성소수자’를 기억하고 ‘성소수자를 위해’ 기도하는 소리가 어렵지 않게 들린다. 이 미사는 성소수자 당사자와 성소수자와 연대하는 사람들이 함께하는 ‘가톨릭 앨라이 아르쿠스’의 서울 지역 월례 미사다.

안전지대로서의 교회 공동체

이 미사가 처음 시작된 2022년 9월부터 가능한 매달 참여하고 있지만, 2년 동안 새로운 얼굴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온다는 사실이 나는 늘 신기하다. 미사에 참여하는 이들은 다양하다. 성소수자 당사자들, 이들의 가족과 친구들,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은 서로 낯설어도 항상 묘한 유대감으로 들떠 있다. 나는 이곳에서는 모두가 ‘나’로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라는 암묵적인 믿음이 그런 분위기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안전한 교회 공동체를 갈망해 온 참여자들의 오랜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성소수자든 비성소수자든, 소외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교회 공동체를 꿈꾼다. 당신이 당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곁을 내어 줄 용기, 현재 한국의 가톨릭교회가 성소수자를 환대하기 위해서 가장 청해야 할 마음이기도 하다.

안전지대로서 환대하는 교회 공동체는 신앙과 정체성 갈등으로 실존적 위기에 처한 성소수자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성소수자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한 많은 연구는, 이들이 자신의 신앙과 정체성을 조화롭게 받아들이고 성장하는 데 성소수자 친화적인 교회 공동체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런 교회 공동체는 성소수자들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할 공간을 제공하고, 공동체의 환대와 다른 구성원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돕는다. 한마디로 숨 쉴 공간, 하나의 쉼터로서 자신의 경험을 새롭게 해석할 틈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성소수자들은 교회에서 쉽게 자신이 ‘잘못’ 또는 ‘악하게’ 창조되었다는 왜곡된 믿음을 학습하기 때문에, 함께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관계와 공간이 절실하다. 당신이 속한 공동체는 어떠한가?

(이미지 출처 = lightinthedarkness.blog)
(이미지 출처 = lightinthedarkness.blog)

경청하며 배우는 교회 공동체

작년 교황청 신앙교리부는 조건부지만 동성 커플의 자녀와 트랜스젠더도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성소수자도 혼인성사의 증인이 되거나 세례성사에서 대부, 대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교리 해석을 내놓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제가 동성 커플을 축복할 수 있다고 공식 승인했다. 이 모든 것이 성소수자 관련 논의가 점차 뜨겁게 타오르던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여정 중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가톨릭 성소수자와 지지자 공동체들은 드디어 주변부의 목소리가 중심에 닿았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들썩였다. 성과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지만, 교회가 성소수자들의 어려움을 알고 이들을 사목적으로 동반할 구체적 방법을 숙고하고 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가톨릭교회 내에는 ‘어떻게 성소수자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성소수자가 참된 신자일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더 지배적인 것 같아 안타깝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담론은 항상 동성애 찬반 논쟁 수준에 그치고, 성과 혼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닫힌 질문은 더 나은 공동체로 성장하기 위한 성찰과 고민을 가로막는다.

성소수자들은 교리를 몰라서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리가 자신의 존재를 다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신앙을 살아내려고 씨름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교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건,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경청하는 교회다. 경청은 당신의 살아 있는 경험으로부터 내가 배우겠다는 겸손과 존중의 자세다. 나는 아르쿠스의 미사에 참여하는 비성소수자 평신도, 수도자, 사제들이 자주 하던 말을 기억한다. “알려고, 배우려고 왔어요.” 나는 교회가 안다면, 성소수자들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진정 안다면, 더 적극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문을 열고, 공간을 트고, 들을 자리를 마련하자. 그로써 나의 세계가 흔들리고, 매일이 불편해진다고 하더라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어느 날 절친한 수녀님이 자신이 생각하는 연대의 모습이라며 알려 주셨던 신영복의 문장이다. 그러니 교회야, 우리 함께 비를 맞자.

최근 모 교구 주보에 ‘동성 커플 축복’에 관한 글이 실렸다. 이 글은 신자들의 의견을 묻는 말로 끝난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그들(성소수자)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이고 축복의 대상인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1997년 미국 천주교주교회의가 성소수자의 부모들에게 작성한 사목 서한을 인용하며 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서한은 성소수자들을 향해 이렇게 쓴다. “여러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우리의 자녀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

1) 미국천주교주교회의, Always Our Children: A Pastoral Message to Parents of Homosexual Children and Suggestions for Pastoral Ministers, 1997.

최지은

오랫동안 예술을 공부했다.
현재 영성 신학을 공부하며 가톨릭 성소수자 연대 단체에서 소소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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