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익숙하던 공항 풍경이 매우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은 텅 비었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은 공항 곳곳을 소독하고 청소하시는 분들뿐이다. 가게는 딱 한 군데 열었다. 사람들은 정중하고 또 조심스러웠는데,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 웃음을 지어 보여도 어색하다. 옛날에 승무원으로 일할 때, 내전 중인 중동 어느 나라의 공항에 도착했을 때조차 이렇게 썰렁한 두려움은 없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마음까지 얼어붙는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면, 그냥 마음이 즐거웠었다. 비행기에서 걸어 나오는 길이며, 입국 수속을 밟은 길이며, 그 길은 늘 가벼웠다. 우리 집에 도착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차례를 오래 기다려 코비드 검사 결과지를 내보이고, 두려움 마음으로 부족한 부분을 열심히 설명하고, 여러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거였다. 나의 사정을 설명할 때, 정성껏 들어 주는 선생님들의 음성과 표정 때문이었다. 그분들은 기계가 아니었다. 단지 참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거부감, 답답함, 혹은 통제로만 여겨졌던 절차들이, 새로운 다른 표정으로 다가왔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귀찮아 하지 않고, 친절하게 자기 일을 해내는 많은 분의 수고가, 정성스러움이 내 맘에 느껴졌다. 세상은 바뀌어도, 그 안에 사람에 대한 마음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무작정 무서워하지는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공항을 빠져나와, 내가 깊이 애정하는 유월의 한국, 풀잎 내음 나는 아침 공기를 마셨다. 유월은 내게 마음을 만나는 달이다. 요즘 누가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촌스럽다고 할 거 같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마음을 만나는 일을 즐긴다. 옆집 강아지가 매일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나의 손과 얼굴을 핥고 돌아갈 때마다, 내 집 언저리 어딘가에 그 강아지의 마음이 남는다. 자가 격리를 하면서, 내가 머무는 이 텅 빈 집에 매일 찾아오는 직박구리의 예쁜 눈동자에서, 창을 덮어 무성히 자란 나무 잎새에게서 무욕한 마음을 만난다. 재개발을 기다리는 빈 집에 나는 머무는데, 버려진 듯 관심받지 않은 이 집을 덮은 나무들은 이 순간도 자란다. 그리고 그렇게 무심하게 새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열어 놓은 현관 문 사이로 삐죽이 내밀은 나뭇가지들이 바람이 흔들리고, 새들이 하루 종일 노래하는 이 집이 사람들의 눈에는 초라할지 몰라도, 내게는 소박하고 다정한 마음들로 가득한 공간이다.
이렇듯 마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거룩한 일인데, 그 일이란 내 주위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고, 무엇이라 단정하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그 안에 숨어 있는 그 무언가, 내가 단정짓거나 이름 지을 수 없는 모름을 향해 열려가는 마음일 것이다. 전화로 오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는 우리 믿음의 선조 이승훈의 삶을 다룬 책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히, 제목이 단순히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라고 적어서 참 좋더라고 했다. 믿음이란 딱 떨어지는 어떤 정답이 있는 그런 표현보다 믿는 일이라는 것은 무언가 열려 있는 것 같다면서. 믿는 일이란 사실 빈 무덤이란 막다른 골목을 대면해야 하는, 그래서 나의 이해와 열정을 너머, 그 너머에 계시는 신의 마음을 만나기 시작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나에게 믿는 일이란, 범속한 일상 속에 깃들인 거룩한 맘들을 만나는 일이고, 늘 계속되는 일인 것이다.
영원한 현재 진행형인 마음을 만나는 일은, 긴 비행 후 검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과 같다. 그것은 마치 "값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이사 55,1)라는 말씀처럼, 넉넉하게 흘러넘치는 풍요로움이며 감출 수 없는 기쁨이다. 이 자가 격리 중에 나는 새벽에 일어나 세계 장상연합회(UISG)에서 하는 수녀 신학자들의 모임에 참여했다. 일년 동안 공부한 것들을 소그룹으로 함께 읽고 나누는데, 마침 나의 짝꿍은 캐냐의 교회 법학자 수녀님 로즈였다. 내가 로고스 너머에 계시는 하느님의 맘에 대해 이야기하고, 법학자인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그녀는, “교회법은 하느님의 맘을 다 담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법은 바뀌는 거야”라고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금지법들이 사람을 살게 하는 법으로 바뀌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동지를 찾은 기쁨으로 신이 났다.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줌으로 만난 이 수녀가 그렇게 가까이 느껴지는 것을 보면서, 하늘나라는 움직이는 것, 믿는 일이란 뜻하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깊이 만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이 학회가 끝나고 이어지는 학회는 미국 신학회였는데, 우리는 정말 사람 좋은 신학자, 밥 슈라이더의 삶을 기렸다. 신학적 깊이뿐 아니라, 인간적인 향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학회에 가면, 그는 언제나 조용히 젊은 학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했으며, 참 다정했었다. 그는 짐짓 자신이 유명하거나 바쁘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어디서나 그는 그저 한 자리에 조용히 웃으며 앉아 있었다. 함께 늙어가는 동료들이 학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그를 축하하는 일도 기쁜 일이나, 내게 기쁨을 준 것은 이번 학회에서, 많은 동료가 논문을 발표하면서, 진심으로 인격적인 가톨릭 학자 밥 슈라이더를 기억하고 기리는 모습을 본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함께 모여 아름다운 삶을 기억하는 것이 결국 내겐 믿는다는 것이고 신학 하는 일인 것 같다.
그것도 아니라면, 힘들게 그러나 깊은 숨을 배우면서, 침묵하던 친구가 첫 서원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올 때, 어떤 영혼이 허영이라고는 한 톨 없이, 믿는다는 일에 충실하기 위해 수도원을 나왔다는 지인의 소식을 들을 때, 기쁨과 서늘함 속에서 믿는다는 것 - 하느님의 마음을 만나는 내 삶의 순례를 생각한다.
유월에는 성당 마당이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아이들이 하얗게 차려 입고, 첫 영성체를 하려고 줄을 서고, 믿는다는 것에 대한 걸음을 시작하는 설렘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내가 자란 삼양동 성당의 유월의 주일날 마당이어도 좋고, 시골 어느 조그만 성당의 마당이어도 좋다. 바람은 아이들의 마음에 씨를 가져다 놓을 것이고, 그 씨는 자라서 나무가 될 것이고, 그 나무에 많은 새가 몸을 쉴 것이다. 믿는다는 일은, 우리가 하늘스런, 그 고요하고, 소박하고, 따스한 그 맘을 배워 가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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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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