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어른들이 울며보는 영화
인간의 근원적 감정은 어쩌면 그리움이 아닐까.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을 보는 내내 어떤 그리움이 코끝까지 찡하게 울려옴을 느꼈다. 모락모락 올라오는 훈김 같은 느낌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와 나, 셋이 더할 나위 없는 일체감 속에 웃고 있는 한 순간. 그 영원과도 같은 어떤 그림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말,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네가 태어나서 정말 기뻐!”는 당연한 말이 아니다. 누구나 평생 듣고 싶어 하는 말이지만, 평생 한 번도 듣고 싶은 이로부터 듣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다. 실상은 누구도 ‘충분히’ 듣지 못한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말일 텐데 이런 기쁨의 말을 해주는 이가 없다. 우리의 슬픔은 몹시도 단순한 데서 온다. 살고 싶은 곳에서 못 살 때, 살고 싶은 이들과 못 살 때, 듣고 싶은 말을 못 들을 때... 이와 반대의 상황들만 차고 넘칠 때.
살면서 차곡차곡 기쁨과 보람을 쌓아올리기 어려워진 세상에서, 기억도 희미한 유년시절의 삽화에 의지해 버텨내라는 건 사실 ‘위로’가 아니다. 억지일 수도 있다. ‘행복하라!’는 이 강박적 주문조차 실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감동한다는 ‘만화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이런 마음을 참 잘도 헤아려 준다. 물론 개별 공식을 짜고 진행되는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특성이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새 생명의 탄생 이후의 순간들이 마치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처럼 기억을 생성-저장-반추한다는 발상에 대해서는 슬그머니 반발심이 들기도 했다. 지나치게 규격화 된 프로그램을 돌리는 느낌도 난다. 그럼에도 몇몇 장면에선 울지 않을 수 없다. 자신에게 선사하는 눈물이랄까.
그리움은 서사(敍事)를 불러들인다. 기억의 핵심은 그리움에 있다. 그리운 것이 있어야 살아가는 일에 의미가 생긴다. 더 이상 아무것도 그립지 않은 이에게, 기억이나 추억이 과연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그런데 그리움이란 묘하게도 어떤 장소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곳을 떠올리면 불현듯 왈칵 밀려오는 기억들이 있다. 그곳에 가면 자기도 모르게 젖게 되는 감회 같은 것 말이다. 장소를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인사이드 아웃>에서도 주인공 라일리가 처한 괴로움이다. 왜 고향 마을을 떠나야 했는지, 왜 정든 벗들과 헤어져야 하는지,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열한 살 라일리는 그저 미네소타 행 버스를 타는 것으로 모든 것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렇게나마, 그리운 것들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꼬마 적 친구 ‘빙봉’으로 상징되는 그 그리움의 대상들이, 한 번 떠나갔다고 해서 영영 잃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번드르르하고 호화롭지 않아도 좋으니 정겹고 지난날의 손때가 묻은 것들이 오래 보존됐으면 좋겠다.

우리의 마음이 길을 잃고 헤맬 때, 그 모든 소중했던 것들이 의미를 잃고 하릴없이 무너져 내릴 때, 슬픔도 힘이 된다는 아니 슬픔만이 우리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지탱한다는 영화 속 깨달음은 소중하다. 그 슬픔의 밑바닥은 그리움과 잇닿아 있다. 물론 그 기억 하나를 붙들고 살기에는, 지나치게 파도가 높게 친다. 그럼에도 파도를 넘고 절벽을 기어오르게 하는 어떤 힘은 있다. 우리 안에서 슬픔과 함께 자라나지만 결국은 이제까지의 자신을 뛰어 넘어 스스로를 새로운 땅으로 올려놓는 힘 말이다.
"이 영화를 우리 아이들에게 바친다. 얘들아, 제발 영영 크지 마."라는 엔딩 자막은 사랑이 담긴 윙크이자 조크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웃다가 뭔가 찡해진다. 모든 이들의 어린 시절과 그 힘겨웠던 성장에 그리고 등 뒤에서 반짝일 추억들에 긴 긴 눈인사를 보내고 싶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루카 3, 22)
김원 /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