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주일 복음 묵상

10월 4일 / 연중 제27주일 (마르 10,2-16)
결혼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사람이 물건이냐? 버리고 말고 하게... 결혼했으면 한 몸이지!” ‘사람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두 가지 입장이 있었다. 하나는 여자가 남자의 보조자라는 생물학적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 때부터 남자와 여자 형태로 만들어졌다.’라는 사회적 생각이다. 성경은 이런 두 관점을 모두 창세기에 기록해 둔 ‘지혜의 서’ 이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는 인류의 가장 기초적인 측면, 번식과 삶의 차원에서 볼 때 둘이 결합되어야만 기능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존재론적 기초에 충실하여 자녀가 쌀 한가마 짊어질 수 있으면 결혼을 시켰다. 짝을 지어 주는 것을 부모의 역할로 여겼다. 일자무식도 신체 장애인도 모두 가정을 가졌다. 수만 년 인류의 오랜 역사는 최근 반세기 사이에 완전히 무너졌다. 개성과 자유의 선풍이 관습에 대한 반역의 시대를 열었다.
생산과 노동을 배워야 할 시절에 공부만 시켜 지적 장애인으로 만들어 버린 교육제도, 자격증 투자금도 뽑을 수 없는 짧은 직업, 믿을 수 없는 결혼과 이혼, 독신자 시대, 공동체 기능이 없는 가정... 소비문화는 끝없는 변종의 인간을 출현시킨다. 눈부신 진보처럼 착각하지만 과학도 문명도 실제는 한없이 퇴보 중이다! 인간과 가치의 상실 시대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은 노동으로 교육하고 적령기 결혼의 의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10월 11일 / 연중 제28주일 (마르 10,17-30)
밥과 인정
사람이 살려면 먹어야 한다. 밥이 하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선 “사람이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인정으로 산다!”라고 말씀하셨다. 가장 훌륭한 삶은 밥과 인정(人情)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인데 참 그럴 수 없게 되어 있으니 하늘이 공평하다. 부자에게는 밥이 넉넉하고 빈자들에게는 인정이 넉넉하다. 그리하여 빈자는 밥을 원하고 부자는 인정을 원한다.
빈자는 부자를 선망하지 말고 인정 많은 이웃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빼앗길 것 없는 대자유에 행복의 길이 있다. 부자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누구나 재물을 좋아한다는 원리를 활용하는데 있다. 부자는 인색하여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나 재물은 누구나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 재물을 내어 빈자와 죽어가는 이를 살리는 일에서 기쁨과 인정과 친구를 얻어야 한다. 부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재물만 내어 놓아도 인정을 얻어낼 수 있다. 빈자와 부자 구별 없이 행복과 완덕에 이르는 길이 공평하게 주어졌다.
그런데 어찌 빈자는 마음을 열어 인정으로 살 생각은 하지 않고 부자가 되지 못해 안달하고 부자는 창고를 열지 못해 탐욕의 종말을 자초할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많다. “가진 것을 나누고 나를 따르라!” 알고 있으면서도 해답을 쓰지 않으니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법을 알려준들 꼼짝이나 하겠는가?
10월 18일 / 연중 제29주일 (마태 28,16-20)
예수의 제자
교회의 현실에 대한 걱정들이 많다. 주일미사 참례자도 줄어들고 노령화가 뚜렷하다! 중산층화 되어감을 걱정한다. 예비자 교리와 새영세자도 줄어들고 견진도 격년에 한 번 해야 할 판이다! 청년과 중고등부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일학교 어린이도 점차 사라져 여름 캠프조차 할 수 없다. 예비신학생도 수도회 지원자도 확연하게 줄어들고 수도자들도 노령화되고 있다!
오늘 우리 시대 본당과 교회의 현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나는 생각하기를 그런 것을 문제로 삼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것은 현상이다. 그 현상만을 조명하면서 문제라고 호들갑 떠는 것은 자본주의 시대의 기업의 매출과 수익의 평가 방식과도 같은 것이다. 성과주의 물량주의 사고에 불과한 것이니 복음정신으로 볼 때는 좀 천박한 시각이다.
“내 제자로 삼아 내가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하셨으니 우리 자신이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일과 사랑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가르치고 따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신자다움으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것, 교회다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상업주의에 휘둘리는 것, 우리 시대에 복음 선포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지 신자들 숫자가 늘고 줄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나밥티스트(재세례파) 공동체는 예수 제자의 삶을 평생 서원하는 것을 세례이자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로 고백한다. 내가 받은 세례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10월 25일 / 연중 제30주일 (마르 10,46ㄴ-52)
구원
당신에게 구원이란 무엇인가? ‘문제의 해결이다.’ 말기암 환자에게는 이전의 건강을 되찾는 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이에게는 진상이 밝혀지는 일이 구원이다. 천상의 구원은 지금 문제의 해결보다 크지 않다. 내가 아는 교우는 국내 대형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다가 마침내 운명하셨다. 유족에게 듣자니 운명하기 전날 의사가 말하더란다. “새 항암제가 있는데 써볼까요?”
문제가 클수록 해결의 결정권도 구원의 실체도 크기 마련이다. 지상에서 해결보기 어려운 큰 문제는 천상 구원의 대상이 된다.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이나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해결의 결정적 고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지 못함에 있다. 맹인 바르티매오는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결정권이 하느님의 자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매달렸다. 믿고 그 분을 만나는 것은 내가 할 일이고, 자비를 베풀어 죄를 없애는 일은 그 분이 하실 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구원이란 열망에서 온다. 그러므로 딱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는 이는 열망도 없고 구원도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그런데 지상의 인간에게 문제없는 자는 없다. 세상은 공동체이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 밖에 볼 줄 모르는 믿음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른다. 기복신앙은 하느님을 자신에게 유익한 해결사로 삼는다. 사람의 뜻을 따르고 해결해 주는 것이 하느님의 의무일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사람의 의무일까?
박기호 신부 / 예수살이공동체 산위의마을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