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하늘빛 매니큐어를 닮은 구원의 이야기
예고편에 끌려 꼭 보기로 마음먹었던 영화였다. 68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도 초청되었다고 했다. 올해 한국영화로는 <무뢰한>과 <마돈나> 단 두 편만 칸에 갔다. 소중한 성취다. 그런데 막상 개봉시기가 되자, 보러 가기가 망설여졌다. 관람에 꽤나 정성이 필요해 보였다. 상영 극장은 드물게, 또 멀리에 있었다. 그것도 하루 한 번 상영하기 일쑤였다. 공연예술도 아닌데, 상황은 그 정도로 제한적이었다. 내용도 어쩐지 보고나면 가슴 아플까 봐 지레 걱정되었다. 하지만 신수원 감독의 <마돈나>는 그 모든 악조건을 감수해도 될 만큼 참 좋은 영화였다. 이야기 자체의 힘도 있고 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얼굴이, 예고편만으로도 뭔가를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 꼭 들어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다고.
영화를 보는 동안, 깊은 몰입에 잠겼다.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완전히 몰두해서 보고 나니 의외로 머리가 맑아졌다. 보기 전에 잔뜩 예상했던 사회비판적 판단들은 이상하게도 안개처럼 흩어졌다. 온갖 불행을 한 몸에 받아 안은 듯 했던 주인공은, 자신의 불행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 때문에 관객을 울린다. 그 간절했던 소망이 결코 헛되이 부서져나가지만은 않았음에 관객은 안도 이상의 코끝 찡함을 느끼게 된다.

대체 미나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불쌍한 년’이라는 벽의 조그마한 낙서가 자신에게 주는 유일한 위로였을까. 어떤 여자가 어떤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의 명품 선물을 받았다 해서, 선물 자체가 관심사는 아니다. 미나가 구두를 받았을 때도, 해림이 샤넬 향수를 받았을 때도 결코 그 선물 자체에 혹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관계를 원했다. 온전한 관계. 그 선물이 관계의 시초로 이어지길 바랐을 뿐이다.
미나는 사랑을, 해림은 믿음을 바란다. 그녀들은 자기의 결핍 요인을 정확히 알고 있다. 상대방이 악의를 품었을 때 여기서 비극은 싹튼다. 자기의 구멍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상대방에게도 자신의 ‘빈 방’을 들키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번엔 돌아오는 게 있을까 싶어 기대했다가 또 무참해지기 일쑤다. 미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정을 쏟고 사랑을 말한다. 해림은 나를 믿느냐고 묻는다. 자기에게는 없는, 자기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요인이기에 먼저 말로 튀어나오는 것이리라. 그러나 절대로 채워질 리 없다는 것도 안다. 왜냐하면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 감각이 뭔지 모른다. 그게 가능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사랑과 믿음의 가능성에 매달린다.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만, 그 최선은 자꾸 불행을 불러온다.

돌아오는 길에 실로 몇 년 만에 매니큐어를 샀다. 여름내 바를 것이다. 미나이자 마돈나였던 그녀, 될 수만 있었다면 열심히 일해 모은 돈으로 행복한 네일아트 숍을 차리는 게 꿈이던 그녀를 생각하면서.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 18)
김원 /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