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주일 복음 묵상

6월 7일 /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마르 14,12-16. 22-26)
치유하고 돌보는 몸
성체성혈대축일. 주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 곧 삶과 생명을 내어주심을 기념하는 날. 매일 미사를 통해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 삶에서 나를 내어 주어야하는 순간을 얼마나 충실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도성’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곳, 하느님께 예배하는 백성들의 성지이다. 그러면서도 ‘도성’은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가 기획되고 진행되는 현장, 억울하고 무죄한 이의 죽음을 획책하는 불의의 어둠이 꾸물대는 곳,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께 탄원하는 자리,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다. 내가 있을 곳이다.
‘물동이를 메고 가는 남자’는 ‘노동자’이다. 그를 따라가서 그가 들어가는 집의 주인에게 만찬의 장소를 부탁하라는 예수. 자유인으로서의 노동자가 아닌 노예, 또는 하인으로서의 노동자인 그를 ‘따라가라.’는 것이다. 예수의 삶을 따르는 나에게 나의 몸과 피를 내어주는 장소(현장)를 안내해주는 것은 ‘남의 집의 하인’, ‘노동자’, 곧 억울한 이들의 눈물이다.
예수께서 “내 몸이다.”라고 하신 몸은 하느님 뜻에 순응하는 존재로서의 몸, 순환하는 몸이다. ‘순환’은 창조질서의 특징이다. 내 몸은 제대로 순환되고 있는가. 내가 세상에 내어 줄 내 몸은 순환되는 경건한 몸인가. 일단 우리 몸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부터 순응된 것이 아니다.
‘따먹어도 되는’ 수많은 열매를 두고 ‘따먹지 말라’는 그 열매에 손을 댄 순간의 어둠은 우리 삶 속에 너무도 치밀하게 들어와 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을 하고 있다. 내가 세상에 내어주어야 할 내 몸은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몸’, ‘기도하는 몸’, ‘치유하고 돌보는 몸’, ‘가난한 이와 소외된 이를 편들어주는 몸’으로서의 존재성을 말한다. 다른 이에게 무관심하고 다른 이들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몸,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몸은 다른 이에게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6월 14일 / 연중 제11주일 (마르 4,26-34)
뿌려진 겨자씨
하느님 나라는 모든 존재가 평화로운 나라. 이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자라나는가.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저절로’ 싹트고 자라난다. ‘저절로’ 는 자동으로 이루어지게 프로그램화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씨를 뿌려놓으시고 그 씨앗들이 생명을 틔우고 자라나도록 만들어놓으셨다.
우리 하나하나가 씨앗이라면 땅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땅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 그분이 파견하시는 곳. 그 곳은 가장 가난한 이들의 자리. 그게 나의 땅이다. 나는 거기 뿌려졌다. 나는 아주 작은 겨자씨이다. 내 마음이 절박한 이들의 자리를 향하는 것은 거기가 내가 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들을 돌보고 물을 뿌려주는 농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의 뿌리가 가난한 이들의 눈물 안으로 깊이깊이 내려지고 뻗어서, 바로 거기서 양분을 얻고 있음을 발견했다.
나는 ‘뿌려진 겨자씨’이고 내가 살아갈 생명과 수분을 공급받는 곳은 바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뿌리를 내리고 뻗어가다 보면 다른 선한 이들이 함께 함으로써, 우리 서로의 존재 안에 뿌리를 내리는 ‘강한 연대의 땅’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힘없고 지친 이들이 쉬어가는 푸르고 푸른 숲이 되도록, 겨자씨 한 알 같은 존재들이 손을 잡는 나라이다.
6월 21일 /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ㄴ-22)
용서
‘두 세 사람이라도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다고 말씀하시는 예수. 두 사람 이상인 예수의 공동체가 ‘마음을 모아 청하는’ 기도. 이는 개인의 기도보다 더 중요한 기도인 ‘공동체의 기도’를 뜻한다. 저마다 개인의 소망이 아닌 ‘공동선’을 위한 기도를, ‘마음을 모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평화,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 등 전체적이고 지구적인 기도를 의미한다. 가난한 이들도 웃고, 굶주리는 이들이 없는 세상을 기도해야하고 그런 세상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이다. 아무리 주님의 사랑으로 출발하여 사랑을 향하는 공동체라도 인간이 두 세 사람 모이면 반드시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용서가 필요한 관계가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는 ‘용서’조차도 마음을 모아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기도해야한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이렇게 생각해본다. 과연 우리가 화해하고 일치를 이루어야할 대상은 누구인가. 단절과 왜곡 판단을 일삼는 관계는 사심이 개입되어있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주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께서 함께하신다면 우리가 용서할 근거는 확실하다. 우리와 함께 계신 그분의 현존과 각 개인이 대면한 그 엄중한 자리를 늘 염두에 둔다면, 어찌 남을 단죄하고 거부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나 부족하고 죄 많은 내가 그분 앞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떤 이든지 우리 안에서 자유로워야하지 않겠는가.
6월 28일 / 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예수 '뒤에서'
땅은 생산성, 생명, 출산 등의 의미에서 모성, 즉 여성에 비유되기도 한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남자에게 귀속된 존재로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을 수 없었던 점을 고려할 때 ‘하혈병을 앓는’ 그 여인은 더더욱 비천하고 수치스런 존재로 열두 해 동안이나 지내왔을 것이다. 병치레로 가산은 물론 여성으로서의 ‘출산과 생명 돌봄’의 기능조차 탕진한 상태이다. 다시 말해 죽은 땅이다. 오늘날 땅도 병들어 그 생명성이 눈에 띄게 변질되고 있다.
그 병든 여인이 두려움에 떨며 ‘뒤에서’ 예수를 만진다. 그렇다면 예수의 ‘앞’에는 누가 있는가? 제자들, 그 당시나 지금이나 힘을 가진 남성들이다. 예수 앞에 있는 이들의 세상은 힘에 의한 질서, 모든 것을 지배적인 논리로 통제 가능하게 설정하고, 서로 맞지 않으면 대화보다는 폭력으로 억압하고 은폐하는 세상이다. 반대로 예수의 뒤에서 예수를 만지고, 신뢰와 믿음과 용기로 예수를 지원하며,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여성들의 세상은 생명과 돌봄의 세상이다. 예수께 대한 강한 신뢰는 ‘뒤에서라도 만지기만 하면 나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했고 그 희망은 여인을 움직이게 했다. 용기를 내어 만졌다. 아무리 좋은 계획과 희망도 ‘용기를 내어 움직이는 행동’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
예수는 반전의 주님이다. 인간의 세계에서 무시당하는 존재에 대한 예수의 편파적인 ‘편들음’은 우리의 에너지다. 여인은 군중들 앞에서 믿음을 칭찬받았고 당당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하혈하는 여인처럼 땅이 신음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의 탐욕으로 착취당하고, 속살이 파헤쳐지고, 난도질 당하는 땅. 땅도 살아나고 여성도 살아나야 한다. 폭력과 파괴의 질서를 생명과 공존, 상호의존의 세상으로 지속가능한 생태계로 만들어가야 한다.
조진선 수녀 / 성가소비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