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
희망은 더디 오고 더디 와서 사람들을 한없이 기다리게 할 뿐 아니라 지치게 한다. 희망은 미약하다. 아니 어쩌면 절망이 너무나도 쉽게 자주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망은 익숙한 방식으로 우리를 무릎 꿇게 하지만, 희망은 낯설게 문득 찾아들곤 한다. 그것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그야말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 뒤에야 그 묘한 부력(浮力)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낯설지만 편안하다. 일단 찾아와 주기만 한다면.
어느 신부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서 말씀 중 하나로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를 꼽으셨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구절이다. 들을 때보다 그 이후 ‘가망이 없어 보여도 희망하라(hope against hope)’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희망의 단 하나의 미덕은, 질기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질김에 속는 게 싫어서 때로는 희망을 아예 갖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희망조차 품지 않은 채 어둠을 건너보려 시도하기도 한다. 무감각해지면 이 짐이 좀 가벼워질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희망조차 품지 않겠다는 각오야말로 가장 절망적으로 희망을 인정하고 저항하는 몸짓이다. 해보면 안다.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지. 그 저항이 투항으로 바뀌는 순간 드디어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라는 말씀의 역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방송 이후 라디오 가요 프로그램은 선곡표가 저절로 ‘토토가 특집’처럼 돼버렸고, 인기곡 순위는 물론 어딜 가도 그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딱 그 무대 그 방송이 뭔가를 강렬하게 점화시켰다는 뜻인데, 과거에 행복했던 건지 지금 이 방송으로 인해 행복한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잠깐 행복했다. 가수도 울고 시청자도 울었는데 울면서 하는 말은 “너무 좋다”였다.
‘토토가’에 출연한 스타들 특히 댄스 가수들의 건재는 왜 그리 눈시울 뜨겁게 감동적이었을까. 이 뜨거움과 울컥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일시적인 것인지 진정 바라던 것인지도 좀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단순한 ‘복고’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상실감이나 아쉬움도, 이전 세대들이 ‘흘러간’ 시절을 회고하는 것과도 뭔가 다르다. 우리 역사에 어쩌면 처음이었던 ‘풍요로운 세대’였던 어떤 한 세대에게, 이전 세대와도 이후 세대와도 달랐던 자신들이 놀았던 ‘물’과 숨 쉬었던 ‘공기’의 냄새가 왈칵 밀려든 것일까.
단지 즐거워서 노래하고 춤추고 어울렸던, 쓸모가 아니라 성과가 아니라 즐거움이 우리를 살게 했던 그 시절이 기억났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분명한 꿈과 전망이 있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다. 즐거움의 소중함을 아직 잊지 않았다. 뜻밖의 희망이다.
김원/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