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어디서 올까

희망은 더디 오고 더디 와서 사람들을 한없이 기다리게 할 뿐 아니라 지치게 한다. 희망은 미약하다. 아니 어쩌면 절망이 너무나도 쉽게 자주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절망은 익숙한 방식으로 우리를 무릎 꿇게 하지만, 희망은 낯설게 문득 찾아들곤 한다. 그것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그야말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매달린 뒤에야 그 묘한 부력(浮力)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낯설지만 편안하다. 일단 찾아와 주기만 한다면.

어느 신부님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서 말씀 중 하나로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를 꼽으셨다. 아브라함이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구절이다. 들을 때보다 그 이후 ‘가망이 없어 보여도 희망하라(hope against hope)’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희망의 단 하나의 미덕은, 질기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질김에 속는 게 싫어서 때로는 희망을 아예 갖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희망조차 품지 않은 채 어둠을 건너보려 시도하기도 한다. 무감각해지면 이 짐이 좀 가벼워질까 해서 말이다. 그러나 희망조차 품지 않겠다는 각오야말로 가장 절망적으로 희망을 인정하고 저항하는 몸짓이다. 해보면 안다.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는지. 그 저항이 투항으로 바뀌는 순간 드디어 희망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라는 말씀의 역설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 MBC <무한도전>의 한 장면
요즘 <무한도전-토토가: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가 장안의 화제다. 2014년 연말부터 2015년 연초까지 3주간은 완전 ‘토토가’에 환호하고 기뻐하며 다음 방송에 무엇이 나올지를 기다리는 설렘이 대중문화 전반을 휩쓸다시피 했다. 정말이지 타임머신을 타고 90년대로 돌아간 듯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 많은 시청자가 함께 동시에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꿈속에서 노닐었던 셈이다.

방송 이후 라디오 가요 프로그램은 선곡표가 저절로 ‘토토가 특집’처럼 돼버렸고, 인기곡 순위는 물론 어딜 가도 그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딱 그 무대 그 방송이 뭔가를 강렬하게 점화시켰다는 뜻인데, 과거에 행복했던 건지 지금 이 방송으로 인해 행복한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지만 잠깐 행복했다. 가수도 울고 시청자도 울었는데 울면서 하는 말은 “너무 좋다”였다.

‘토토가’에 출연한 스타들 특히 댄스 가수들의 건재는 왜 그리 눈시울 뜨겁게 감동적이었을까. 이 뜨거움과 울컥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일시적인 것인지 진정 바라던 것인지도 좀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단순한 ‘복고’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상실감이나 아쉬움도, 이전 세대들이 ‘흘러간’ 시절을 회고하는 것과도 뭔가 다르다. 우리 역사에 어쩌면 처음이었던 ‘풍요로운 세대’였던 어떤 한 세대에게, 이전 세대와도 이후 세대와도 달랐던 자신들이 놀았던 ‘물’과 숨 쉬었던 ‘공기’의 냄새가 왈칵 밀려든 것일까.

단지 즐거워서 노래하고 춤추고 어울렸던, 쓸모가 아니라 성과가 아니라 즐거움이 우리를 살게 했던 그 시절이 기억났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분명한 꿈과 전망이 있었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는 아직 늙지 않았다. 즐거움의 소중함을 아직 잊지 않았다. 뜻밖의 희망이다. 

 
김원/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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