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주일복음묵상] 대림 2주일-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김용길

 

자격

12월 7일, 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 : 마르 1, 1-8

우리 중에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의 “자격”을 논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작품”(에페2,10)인데, 우리 중에 누가 감히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잘난 체를 할 수 있겠는가? 자격은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어떤 역할이나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 또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격”을 누가 그에게 부여하는가?
빌라도가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네가 위로부터 권한을 받지 않았으면 나에 대해 아무런 권한도 없었을 것이다.”(요한19,10-11)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하느님 앞에서 자신과 다른 이의 “자격”을 비교하여 논하고, 자신의 “격조”를 운운하는 이가 있다면, 자신의 이기적 탐욕만을 내세우려드는 함량미달의 “어리석은 처녀”(마태25,3)가 아니겠는가? 제대로 사는 인생이란 능력 있는(자격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증언


12월 14일, 대림 제3주일 (자선주일) : 요한1, 6-8, 19-28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무엇을 실천했노라고 주님께 고백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필리4,11)도 알지 못하면서, 또 “남이 너희에게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지”(마태7,12)도 않으면서, 우리 중에 누가 감히 어렵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나팔을 불며”(마태6,2) 다닐 수 있겠는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마르3,35)이라면 그가 곧 참된 복음을 증언하는 주님의 사람이다. 증언은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 속에 자비가 없다면, 그것은 참되지 못하고, 자비 없는 진실은 반쪽짜리다. 또 자비에 진실이 없다면, 그 자비는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반쪽짜리다.
그러므로 진실과 자비는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되며, 진실 없는 자비, 자비 없는 진실은 모두 인간의 삶을 천박하게 만들 뿐이다. 이 ‘자선주일’에 진실성이 없는 자비 혹은 자선만을 베푼다면 우리는 삶의 기준이 잃어버리게 되고, 자비 없이 진실만을 강조하면 “사랑”을 잊어버리고 말 뿐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12월 21일, 대림 제4주일 : 루카 1, 26-38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세상에서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날 신앙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재물과 권세와 명예를 두려워하여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하느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고백할 수 있다면, “역경이나 박해나 칼이나 헐벗음, 그리고 위험이나 칼”(로마8,35)등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 따위가 어떻게 우리를 주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분부에 따라 다 하고 나서 주님 앞에 나와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루카17,10)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하느님의 손길에 의해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마음은 곧 “죄”가 아니더냐?
우리들의 시대에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만 얻고, 그 지식(깨달은 것)을 실행하지는 않는다. 무엇이 두려워서일까? 믿음(신앙)은 하느님께서 선하시고, 그분이 내게 선함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인데, 지금 우리는 무엇이 두려워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단 말인가?

 

은총


12월 25일, 성탄대축일 : 요한 1, 1-18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가운데 주님의 은총을 입지 않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아무도 없지 않은가. 모두들 주님의 은총 덕분에 생명을 얻어 세상을 살아간다. 모두들 주님의 백성이요 자녀들이며, 어느 누구도 그분의 생명의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생명을 거부하고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을 헤매기를 자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그래서 생명이신 분, 빛이신 분, 은총이신 분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은총의 날개 품으로 모으시는데, 그분의 백성인 우리는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이 얼마나 부조리한 인간의 삶인가? 이 부조리한 삶은 깨부수고 그분의 뜻을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해나가는 것이 곧 그분의 자녀 된 도리가 아닐까?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몸을 입으셨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몸을 입고”(갈라3,27) 이 땅을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

 

봉헌


12월 28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축일 : 루카 2, 22-40

가정을 포함한 모든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공동체다. 그 사랑은 우선 자신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끝없이 봉헌(내어줌)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자기를 내어주는 행위가 곧 사랑이며, 사랑은 영원하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은 영원하지도 않고 또 점차 식어간다고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우리를 사랑으로 내신 분이 곧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영원한 분이시며, “영원하신 분이 곧 사랑이시기”(1요한4,16)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사랑”이 영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랑을 왜곡하고 있거나, 오해하고 있거나, 혹은 탐욕이나 욕망을 사랑으로 곡해하는 자들이다. 자기 포기, 비움 없이 사랑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자기 고통 없이 자기 봉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고통 없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랑 받는 존재에게 고통당할 각오가 없다면, 사랑의 본질(헌신, 봉헌)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 봉헌이 빠져 있다면,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결코 찾지 못한다. 본래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아닌 또 다른 살아 있는 존재들에 의해 힘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신대원 신부/안동교회사연구소 소장, 우곡성지 담당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