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처음 일본을 방문하고 거의 30여 년 만에 두 번째 방문길에 올랐다. 팍스 크리스티 코리아 나가사키 평화순례단의 일원으로서였다. 바쁜 일상 탓에 평화순례에 필요한 준비를 거의 하지 못한 채였다. 그럼에도 역사의 현장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2019년 11월 22일(금)부터 25일(월)까지 꼬박 4일간 진행된 순례여정에서 느낀 것이 적지 않아 개인 자격으로나마 독자들과 소감을 나누려 한다.

1. 이번 평화순례 여정은 크게 두 가지 테마로 짜였다. 하나는 평화순례 목적에 충실하게 평화가 주제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 가톨릭 순교신앙이었다. 둘의 성격이 나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편의상 둘로 나누었다. 이 순례기는 평화 주제다. 세 번에 나눠 연재한다.

2. 나는 우연히 순례를 떠나기 한 주 전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삶을 다룬 "나가사키의 노래"를 읽게 되었다. 지인이 세미나에서 발표하기로 한 논문을 읽어 주다 그 글에서 그의 사상을 다룬 부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음 날 나는 부리나케 바오로딸 서원에서 이 책과 나가이 박사의 자전적 소설 두 권을 샀다. 떠나기 전 그래도 한두 권은 읽어 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무엇보다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조금이라도 원폭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선택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평화순례에 임하는 태도를 새롭게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내내 동행하진 못했지만 우리 일행은 셋째 날 합천에서 오신 원폭피해 1,2세들과 만날 수 있었고, 마지막 날에는 일본의 원폭피해자 1,2세들과도 만나 기도회를 드릴 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이 책들 덕으로 이분들을 대하는 태도를 새롭게 가질 수 있었고, 원폭과 관련된 현장들을 방문할 때도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었다.

3. 일본 규슈는 부산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 있다. 고대로부터 한반도와 교류가 많았던 곳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거리에 불과 절반 밖에 되지 않는 곳이니 가로막힌 바다만 아니라면 여러 면에서 한반도 남쪽과 더 가까운 곳이 될 수 있었으리라. 한일 관계가 냉각된 시기에 방문하다 보니 나가사키 직항 대신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버스로 두 시간 남짓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나가사키에 있는 숙소들은 교황님 방문 소식으로 일 년 전에 동이나 나가사키시에 인접한 이사하야시에 숙소를 정했다.

일정 둘째 날(11월 23일 금요일) 평화 기행의 첫 번 방문지인 사가시를 향했다. 오전에 요시나가리 역사 공원에서 합천에서 출발한 한국인 원폭 피해자 일행과 이분들을 동반하는 평통사 팀과 만나기로 하였고, 가톨릭평화방송에서는 이때부터 동행취재를 기약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만나기로 한 일행은 오지 않았다. 후쿠오카 공항에서 일부 회원들에게 입국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님과 사무국장님은 공항에서 다섯 시간이나 억류되었다가 한국 외교당국, 나가사키 교구관계자들이 항의하고 나서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사태로 당일 함께 하기로 한 일정은 무산되고 우리는 우리대로 이 팀은 이 팀대로 움직여 셋째 날을 기약하게 되었다.

4. 우리 일행은 공항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심란해져 요시노가리 유적 탐방을 대충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두 번째 방문지인 아리타로 향했다. 아리타에는 임진전쟁 때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이 살았던 마을이 있다. 그 마을 뒤편에는 이들의 후손이 여전히 도자기를 만드는 도자기 마을이 있다.

혹자는 이곳에는 왜군에게 끌려온 도공들뿐 아니라 스스로 조선을 탈출해 자신들의 재능을 인정하는 이곳에 정착한 이들도 있다고 주장한다. 기록에 따르면 임진전쟁 당시 끌려온 조선 도공의 숫자는 900여 명이라 한다.

먼저 방문한 장소는 이 도공들을 처음 이주시켰던 곳이다. 이곳은 아리타 마을 뒤편 험한 산 너머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도자기의 필수 재료인 흙, 땔감, 물을 구하기에 최적지라서 선택되었다고 한다. 본래 이곳은 일본인 도공들이 살았던 곳인데 영주가 이들을 다른 곳으로 추방하고 대신 조선도공들을 정착시켰다고 한다. 조선도공들은 이곳에서 전혀 차별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인보다 대접을 더 잘 받았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대를 물려 조선 도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집집마다 조그만 가마를 두고 도자기를 굽고 있었다. 이들의 도자기는 일본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어 조선의 도자기 기술을 배우려는 이들도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이 마을은 산 중턱에 있는데 거의 7부 능선까지 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골목을 누비며 조선도공들의 숨결을 느꼈다. 마을 입구 개울 건너에는 조선도공들의 무덤이 있었는데, 여기에 조선도공을 대표하는 이삼평 선생의 묘도 있었다. 다들 일정에 쫓겨 엄두를 못 냈는데 우리 일행 가운데 한 명인 평화의 소녀상 작가 김운정 선생만은 잰걸음으로 참배를 다녀왔다. “그래도 내 분야의 대선배님이신데 인사를 올리고 가는 게 마땅하지요.”

이곳 뒤편에 자리한 도자기 마을로 가기 위해 대절한 버스에 올랐다. 그곳은 차로 이 마을에서 이십여 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 마을은 조선도공들이 도자기를 구워 외국에 수출해 벌어들인 수입 덕에 번창 일로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1만 40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선도공들이 생산한 도자기는 1651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통해 유럽에 수출되었다. 일본에서도 최고의 진상품으로 대접 받았다. 아직도 이곳에는 조선의 성씨를 사용하는 도공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하다.

일행이 버스에서 내려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나와 김운성 작가는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이삼평 선생을 기리는 신사와 기념탑에 다녀오기로 했다. 머무는 시간이 짧아 서둘러야 했다. 정상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경사가 급해 숨이 가빴다. 거의 뛰다시피 해서 신사에 이르렀고 이 신사에 모셔진 이삼평 선생에게 예를 표하고, 다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정상을 향해 뛰었다. 정상에서는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고, 건너편으로는 조선도공이 처음 정착했던 산의 뒷자락이 보였다. 이삼평 선생 기념비에 간단히 예를 표하고 한글로 쓰인 비문들을 사진에 담았다. 석양을 바라보면서 일행이 기다리는 곳으로 다시 뛰어 내려왔다.

5. 한국과 일본이 먼 나라가 되기 시작한 첫 번째 큰 사건이 임진전쟁이다. 혹자는 이 전쟁을 조선과 왜의 싸움으로 보지만 실제로는 명나라의 참전으로 동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벌어진 국제 전쟁이었다. 물론 첫 번째는 660년에 있었던 라·당 연합군과 백제 사이의 전쟁이었다. 백제 멸망 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왜의 군대가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왔다. 이들은 지금의 금강에서 패했고, 부흥운동도 라·당 연합군에게 진압을 당했다. 이후 백제 유민들 상당수가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임진전쟁이 끝난 지 삼백 년 뒤에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청과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세 강대국은 자국 영토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을 치렀고 그 피해는 전적으로 우리 몫이었다.

조선도공은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나라에서 먼 나라로 가기 시작하는 첫 길목이었던 임진전쟁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이 차별 없이 심지어 일본인보다 더 대접을 잘 받았다고는 하나 그들은 엄연히 전쟁포로였다. 우리가 평화여정을 이곳에서 시작한 이유다. 일본과 한국이 다시 가까운 나라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 나라가 되기 시작했던 사건에서부터 출발해야 했던 것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PCK 연구이사, 신학자, <가톨릭평론>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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