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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천주교회의 과거와 현재북한 신자들, 사제 열망

가톨릭 동북아평화연구소는 9월 28일 경기 파주시 민족화해센터에서 “북한 천주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열린 세미나를 열었다.

연구소 소장인 강주석 신부는 이번 세미나 주제에 대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북한 교회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면서 “북한 교회의 존재를 기억하고 현재의 모습을 잘 알기 위해 북한 교회의 역사를 공부해야 미래에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다”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말했다.

이번 강의는 예수회 민족화해위원장 김연수 신부가 맡았다.

김 신부는 먼저 북한 사회에서 천주교회가 성장하지 못한 이유를 “천주교회의 오래된 강한 반공의식으로 공산당 정권에 비협조적, 비판적”이었고, “성직자와 수도자가 없어 성사생활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 북한을 대표하는 “조선카톨릭교협회에 대한 남한 천주교회의 진정성 논란”을 꼽았다.

그는 북한 천주교회가 겪은 어려움과 현재 북한 교회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 1800년대부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시기, 한국전쟁 전후와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북한 교회의 역사를 설명했다.

김 신부에 따르면, 북한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전이며, 박해 뒤 신자들이 북한 지역으로 유배나 피신해 오면서 가톨릭교회는 더욱 확산되었지만 감시와 고립 때문에 신앙공동체를 이루기에는 어려웠다고 한다.

북한 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선교사들에 의한 전래”가 아닌 “자국민에 의한 전래”라는 특징이 있으며 박해에도 비밀리에 신앙생활이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에는 지정학적으로 소외된 지역의 특성 때문에 천주교 성장이 늦어 1920년대에 이르러서야 원산교구, 평양교구, (그리고 두만강 건너 북간도 지역에) 연길지목구, 의란자치선교구가 설정됐다.

김 신부는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학교 종교 교육을 금지시키며 종교 시설과 성직자를 통제하는 반 종교 정책을 시행”했음에도 당시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층은 “제국주의 국가 출신 선교사들이라 일본 제국주의를 정당한 권력으로 인정했으며 민족의 문제보다 교세 확장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톨릭교회 지도층이 독립운동을 금지했음에도 한국인 성직자, 신학생, 수도자, 평신도들은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특히 북한 지역에서 가톨릭계 독립운동이 활발했다고 밝혔다.

김 신부에 따르면, 1945년 해방 뒤 북한 정권은 종교인 세력을 무시할 수 없어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회유책으로 종교단체를 결성하게 했다. 단체에 가입한 종교인들은 당국의 정책을 지지하고 협력했으나 가톨릭 신자들은 무신론적인 공산주의 사상에 간접적으로 저항하면서도 전교에 크게 노력한 결과 1948년에는 북한 지역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9월 28일 가톨릭 동북아평화연구소는 "북한 천주교회의 과거와 현재"를 주제로 파주시 민족화해센터에서 세미나를 열었다. (사진 제공 = 가톨릭 동북아평화연구소)

1950년 한국전쟁 뒤에는 북한 정권이 종교인들을 적대계층으로 분류해 감시와 반종교 교육을 펼쳤고 이 때문에 남한 교회의 반공의식은 더 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북한 신자들은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이어갔고”, “1968년 당국이 가정예배를 허용하면서 1970년대에는 가정에서 모여 기도한 사실을 북한 신자들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고 말했다.

김 신부는 “북한 신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녀들에게도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었다”면서 이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역사가 박해와 광명의 시기를 거듭하면서 존립하고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 북한의 독자적 주체사상이 무신론적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대체하면서 북한 당국도 종교를 새롭게 바라보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마련됐다.

그는 “북한 종교인들과 당국자들은 우리는 주체사상주의자이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신의 유무가 문제되지 않으며 인간과 민족을 위한 것이라면 무엇과도 대화할 수 있다”는 주장을 대외적으로 밝혔다고 소개했다.

한편 교황청은 북한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기 위해 노력했고, 1980년대 중반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프랑스 원조 기구를 통해 50만 달러를 제공하면서 대화채널 마련에 성공했고, 1988년에는 북한 신자 두 명이 교황청에 초대받아 한국전쟁 뒤 처음으로 교황청 방문이 이루어졌다.

김 신부는 북한 신자들이 남한교회와는 1995년 뉴욕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주제로 하는 세미나 형식의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처음 만났고 그 뒤로도 접촉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북한 가톨릭계는 북한 천주교를 대표해 북한을 방문하는 성직자와 신자들을 만나고 원활하게 교류하기 위해 1988년 조선카톨릭교협회를 만들었다.

협회는 두 권의 교리서와 한 권의 기도서를 출간했고 중국와 일본 가톨릭계와 교류했다. 한때 협회의 정치적 행보로 인해 서울대교구 교구장이며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그 협회는 정치집단이지 교회가 아니지만 천주교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협회 결성과 함께 평양에 장충 성당도 같은 해 완공됐다. 그해 10월 서울대교구 장익 신부와 로마 유학중이던 정의철 신부가 장충성당에서 최초의 미사를 봉헌했으며, 그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북한 신자들에게 성작, 성합, 제의 등을 선물했다.

그 뒤로도 많은 사제들이 장충 성당을 방문해 미사를 봉헌하고 세례를 한 차례 주기도 했다.

김 신부는 “장충성당 신자들은 미사나 공소예절에 참여할 때 성당 안에서는 누구도 김일성과 김정일 배지를 달지 않는다”면서 “북한 사회에서는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북한 당국이 이를 허용했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북한 당국이 종교의 자율성과 고유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도 매주 일요일 장충 성당에서 공소예절이 진행되고 있고, 지난 30년 동안 지속적으로 종교행사가 거행되었다.

그는 북한 신자들은 사제를 두고 싶어 하는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서 “정기적인 사제 파견은 북한 천주교회의 성장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필요한 협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북한 교회에 사제 파견”, “장충 성당 재건축과 운영에 대한 지원” 등을 통해 “북한 교회와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당부했다.

연구소는 동북아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올해 4차례의 세미나를 준비했고, 그중 이번 세미나는 세 번째다. 다음 세미나는 10월 19일 의정부교구 신앙교육원에서 열리며 한림대 이삼성 교수가 ‘동북아 평화 당면 현실과 미래 전망’을 주제로 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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