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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선교 대헌장, '가장 위대한 임무' 100주년교황 베네딕토 15세, 현지인 사제 양성, 유럽 식민정치 결별 강조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1919년 11월 30일 발표한 선교에 관한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Maximum Illud)가 100년을 맞았다.

“20세기 가톨릭 선교의 대헌장”으로 불리며, 20세기 초 식민주의와 혼재된 선교 의식과 결별하고 새로운 선교 패러다임을 제시한 이 문헌은 당시 한국을 포함한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지역 가톨릭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서는 제대로 소개할 기회가 없었던 이 문헌을 반포 100주년을 맞아 부산교구 한윤식 신부가 새롭게 번역해 내놨다. 한윤식 신부의 도움과 한 신부의 논문 ‘20세기 초반 교황청의 주요 선교 지침’을 인용해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의 해설을 소개한다.

선교 현실과 시대의 징표를 따른 선교
당시 유럽 열강 식민정치와 결별한 선교의 자유
현지인 사제 양성 강조, “현지인 사제는 부차적 직무 담당 아니다”
여성의 역할 간과하지 말 것
선교지를 통치하는 이들의 무능 경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른바 자기 선교지의 영혼이 되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15세 교황.(1914-22)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가장 위대한 임무'는 사실 포교성성 설립(1622년) 뒤 가톨릭 교회의 해외 선교와 관련해 교황청이 견지한 입장을 다시 확인한 것이었다.

주교나 대목구장 또는 지목구장과 선교사를 비롯해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한 이 서한은 선교에 대해 “이교도의 개종을 위한 선교사 파견과 선교활동 조직”을 넘어 “선교 현실을 직시하고 시대의 징표를 따라 선교 방법을 바꾸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천명한다.

이에 따라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현지인 사제 양성을 통한 지역 교회의 설립, 유럽 열강의 식민지 정치와 결별한 가톨릭 선교의 자유, 지역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적응(토착화)” 등의 지침을 강조했다.

베네딕토 15세는 유럽의 식민지주의와 가톨릭 선교를 근본적으로 분리하려는 의지에 따라 선교활동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어떠한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되며, 선교 활동은 서구 열강의 정치적, 민족적 이권과 무관하게 수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지역 문화에 대한 선교적 적응”과 관련해 선교사들이 자신의 조국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이들임을 강조하고, 현지 언어 습득 등을 통해 복음 선포를 지역 언어와 관습에 적응시킬 필요성을 분명히 했다.

이에 대해 교황청 포교성성은 1920년 1월 훈령을 통해 “가톨릭 선교가 식민주의 정책이나 그 이권에서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다시 강조하고,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자국의 언어를 가르치거나 자국의 습관, 풍습 도입, 자국의 통상 사업 지원 등을 금지, 절대적인 정치적 중립” 등을 확인했다.

다음은 '가장 위대한 임무'에서 베네딕토 15세가 각 선교 주체에 당부하고 강조한 주요 내용이다.

“주님의 포도밭의 한 부분을 경작하도록 위탁받은 이가 자신에게 위임된 부분을 마치 자신의 소유지처럼 간주하고 질투하며 다른 이가 손도 대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의 이런 행동은 얼마나 많은 질책을 받겠습니까!”

우선 교회 장상들에게 교황은 “선교지를 통치하는 이들의 무능”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경고하고,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각지의 협조자를 불러들일 것과 복음 설교를 위한 선교 거점 및 신자 공동체 설립 등을 권고하며 이를 위해서는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 협조자도 함께 청할 것을 요청했다.

또 우선적 관심을 ‘현지인 사제 양성’에 둘 것을 강조해, “양성은 문명화된 나라의 사제들에게 주어지는 것과 같이 완전하고 완벽하게 이뤄져야 한다. 부차적 직무만 맡는 낮은 단계의 현지인 사제 양성이 아니라 현지인 사제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맡아 다스릴 수 있도록 양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회원들. (사진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선교회' 항)

“만약 자신의 고귀한 품위를 망각한 채 천상 왕국보다는 지상의 조국을 더 생각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좋아하고, 항상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이 칭송받기를 바라는 선교사들이 있다면 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개탄할 일입니다.”

베네딕토 15세는 또한 선교사들에게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하고 하늘나라의 시민을 늘릴 책무”와 금전욕의 철저한 경계를 요구했다.

이는 당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정책에 선교 사업이 크게 영향 받고 때로는 서로 이용하는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선교 활동에 있어 서구열강의 식민지 정책과 관련된 어떠한 타협도 안 되며, 선교는 서구 열강의 정치적, 민족적 이권과 무관하게 수행되어야 한다”는 선교지의 자주성을 강조한 의지 표현이었다.

또 선교사들에게 해외 선교를 위해 세상과 교회의 필요한 모든 교육을 받을 것과 선교지 민족의 언어를 철저히 습득할 것, 선교사 스스로의 삶의 성화, 여성을 간과하지 않을 것 등을 당부했다.

“선교지의 신자들은 비신자들을 돕는 것이 자신들과 직결된 의무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제 이웃에 대한 계명을 주셨기’(집회 17,14) 때문입니다. 사실 이웃이 긴급한 상태에 있으면 있을수록, 이 의무는 그만큼 더 막중하게 됩니다.”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모든 신자에게도 선교지의 도움에 응할 것을 요청하고, “선교 사업을 위한 기도, 부족한 선교사 수의 보충과 선교사들의 선별, 선교 사업에 대한 물질적, 영적 지원” 등을 요청했다.

“가장 위대한 임무”의 계기, 1914년 중국 ‘천진 사건’
'식민지'로 인식된 선교지

1898년 1월 15일 프랑스 신문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열강들의 중국 분할 구상을 풍자하는 만평. 영국 빅토리아 여왕,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 프랑스의 마리안, 일본의 사무라이가 힘없는 청나라 관리를 외면한 채 '중국'이라고 쓰인 파이를 칼로 나누고 있다.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교황청이 이러한 선교 정책을 제시한 배경은 무엇일까?

직접적 배경으로는 1800년대 후반 중국의 가톨릭 선교 문제와 이것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천진 사건’이 결정적이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당시 서구 열강에 의한 선교 활동 전반의 오랜 문제가 있었다.

1860년 (2차)아편전쟁이 끝난 뒤, 중국에서는 서구 열강과 체결된 ‘불평등 조약’들에 근거해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이 다시 시작됐다. 불평등 조약으로 중국인의 반외세 정서와 적대감이 높아짐에도 중국에서 가톨릭 교세는 놀랄 만큼 확장됐으며, 1914년 일어난 1차 세계대전으로 선교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중국 교회는 꾸준히 성장했다.

교세가 확장되는 중에도 중국에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낯선 종교, 나아가 침략자들의 종교였다. 그러나 선교사 대부분은 자국의 보호 아래 ‘순교 영성’으로 무장된 전통적 선교 방식을 고집했다.

반외세, 반그리스도교 분위기에서 1899년 일어난 ‘의화단 사건’으로 인한 선교사들의 죽음은 서구 열강과 중국 정부 간 불평등 조약 체결의 빌미가 됐으며, 이들에 대한 배상금은 선교 자금으로 인식됐다.

유럽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교회와 선교사들을 보호했지만 교회는 제국주와 식민주의를 선교와 구분하지 못했다. 또 선교사와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는 오히려 각 지역민과 그리스도교를 차단하는 결과를 빚었다.

1845년 당시 교황청 포교성성은 이미 각 선교지의 독립과 주체적 성장을 강조하는 지침을 내렸지만 중국의 선교 수도회들은 이 지침을 무시했으며, 각각의 선교지는 이를 위임받은 선교사들의 국적에 따라 그들(선교사) 나라의 ‘식민지’로 인식됐다.

이런 가운데 1914년 일어난 “천진 사건”은 교황청이 각 지역 선교의 총체적 문제를 파악한 계기가 된다.

천진 조계는 1860-1947년 동안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일본, 프랑스, 벨기에, 헝가리 등의 나라가 불평등 조약을 통해 중국 천진 남동부에 행정 자치권과 치외 법권을 성정한 조차지다. (이미지 출처 = ja.wikipedia.org)

1911년 신해혁명, 1912년 중화민국 설립 등으로 중국에서는 서구 열강의 정치, 경제적 권력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이뤄졌고, 그리스도교 역시 적대적 대상이 됐다. 1914년, 프랑스 영사가 중국의 항의에도 일방적으로 천진의 프랑스 조차지(빌린 영토)를 신학교와 대목구장의 관저가 있는 ‘로서개’ 지역까지 확장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중국인 사제와 신자, 일반 중국인뿐 아니라 해당 지역 선교를 맡았던 라자리스트 선교사들도 불만을 드러내고 프랑스 영사를 비난했다.

이로 인해 당시 해당지역 대목구장 대리인 뱅상 레브 신부가 천진에서 떠나도록 조치가 취해졌고, 중국인 신자와 사제, 선교사들은 교황청 포교성성을 통해 교황청 개입을 요청했다.

레브 신부와 꼬타 신부는 중국에서 이뤄지는 선교 방법의 문제점을 포교성성에 보고하며, “토착화 의식의 부재, 현지인 사제 양성 부족, 중국인에 대한 편견, 선교 방법으로써 금전 사용의 남용, 사목지 신자간 다툼에 대한 선교사들의 개입, 설교 등한시” 등 문제를 제기했다.

이 고발로 교황청 포교성성은 중국의 대목구장 6명에게 질의서를 보내 중국 선교의 주요 문제가 “선교지 장상들의 고립, 선교활동 조정 부재, 중국인 사제와 서양 선교사들 간 대등한 관계 정립 필요, 교리교육과 중국어 습득 문제” 등에 있으며, 특히 선교지 장상들의 상호 협조와 선교활동 수행 조정이 가장 절실하다고 파악했다.

교황청은 1919년 7월 22일 파리외방전교회 총장이자 중국 광동 대목구장 게브리앙 주교를 중국과 인접 국가에 사도좌 순시관으로 임명, 파견했고, 베네딕토 15세는 게브리앙 주교의 순시 보고서를 읽기 전 이미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를 발표한다.

선교, 이교도의 개종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대의 징표를 따른 선교 방법 전환 필요
지역문화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적응 강조

이같은 베네딕토 15세의 선교 지침은 중국의 ‘천진 사건’을 계기로 비롯됐지만, 중국 선교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1659년 교황청이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을 교황대리감목구장으로 파견할 당시 이미 제시한 훈령의 핵심을 다시 천명한 것이었다.

정치, 외교적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선교, 지역 문화 존중과 적응, 현지인 사제양성 등 지역교회 뿌리 내리기 등을 강조한 '가장 위대한 임무'는 오늘날의 선교에도 여전히 적용되어야 할 중요한 지침이며, 1920년대 이후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베네딕토 15세의 이러한 선교 지침은 뒤를 이은 교황 비오 11세에게 계승됐다.

‘선교’를 각별하게 인식했던 교황 비오 11세는 1926년 2월과 6월에 각각 선교회칙 “Rerum Ecclesiae'와 서한 'Ab ipsis'를 통해 특히 “현지인 사제 양성과 지역교회 설립에 대한 지침”을 강조했다.

현지인 사제 양성과 주교 임명, 지역교회 설립과 관련, 비오 11세는 현지인 사제들이 부차적 사목 수행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고, “가톨릭 선교가 목표로 하는 바는 무수한 나라 안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설립되고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일렀다.

또 현지인 사제 양성에 대한 신학적, 사목적 정당성을 명확히 하는 한편, 서양인과 비교해 현지인이 열등하다는 편견을 배척하고, “유럽과 현지인 선교사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으니 모든 분리의 간극은 메워져야 하고 상호간 존경과 사랑을 드러내며 서로서로 굳건히 결합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비오 11세 교황.(1922-39)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비오 11세는 또 베네딕도 15세의 '가장 위대한 임무'에서는 조명되지 못한 남녀 현지인 수도회 설립과 교리교사 제도 장려, 수도원 설립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이들 역시 지역교회 설립과 선교지 복음의 주요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당시 중국에 널리 퍼져 있는 “선교는 정치적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선교사들은 외세의 대변인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억압받는 민족들의 권리를 변호하고자 한다. 선교는 전적으로 영적인 성격이며 정치적 사안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천명했다.

베네딕토 15세와 비오 11세 교황의 이같은 선교 지침은 “선교란 교회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것이 아니며, 교회가 받은 본질적 사명이라는 인식을 다시 확립하는 계기”였으며, 교회의 보편성이라는 기본 원칙에 따라 선교의 ‘수도회 중심주의’를 넘어 현지인 사제 양성이라는 중요한 목적을 이해하고 실현하도록 새롭게 촉구했다.

또 당시 선교사들 사이의 민족주의, 식민지 정책이라는 정세에서 벗어난 가톨릭 선교의 자유를 강조하고, 복음과 서구 유럽 문화를 동일시하는 선교사들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복음이 지닌 순수성을 지킬 필요와 지역 문화 적응을 통한 그리스도교 전파를 강조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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