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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교회에 '한국전쟁'은 왜 성전이었나?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이 시대 평화 위한 교회 역할을 묻다

분단 70년 만에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이 "해방정국, 분단 그리고 한국천주교회"를 주제로 22일 연 심포지엄에서 20세기 중반 한국전쟁 전후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 형성된 반공주의와 극복 방안을 깊이 있게 토론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역사학자 김기협 씨(레오)가 1945-48년 정세와 교회, 제주학연구센터 전문연구원 김선필 씨(베드로)가 ‘광복 이후 남북 분단 과정과 한국교회’, 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강주석 신부가 ‘분단과 전쟁에 관한 교회의 성찰’을 발제했다. 토론은 각각 청주교구 김인국 신부, 서울대교구 나승구 신부, 예수회 김연수 신부가 맡았다.

1780년대 서학운동부터 해방공간까지, 국가를 만나지 못한 교회

먼저 김기협 씨는 해방 정국과 분단 시기, 한반도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서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했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오늘날 다시 민족국가 건설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짚었다.

그는 1780년대부터 해방과 분단까지 200년간 한반도에서 가톨릭교회는 제대로 된 나라를 만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며, 이제 새로운 거버넌스의 탄생과 함께 그에 맞는 교회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먼저 그는 조선에서 자생적 서학운동으로 천주교가 들어올 당시인 17-18세기 가톨릭교회는 선교에 있어 ‘적응주의’가 패퇴하고 ‘비타협적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조선의 서학운동에는 비체제와 반체제의 길이 강요됐으며, 이는 탄압으로 이어지고 가톨릭교회와 조선 사이에 많은 원한을 불러왔다고 설명했다.

1890년에서 1933년까지 조선교구장을 지낸 뮈텔 주교의 태도에서 당시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볼 수 있는데, 그가 실시한 선교정책은 기본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설립 목적과 특성, 19세기 신학과 교회의 공식 태도, 서구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에 기반한다.

이 같은 교회의 태도는 초월신앙, 엄격한 도덕성, 군주제 옹호, 근대화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기반으로 하며, 현실보다는 교회내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정의구현을 위한 사회참여에 무관심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가 만난 당시의 조선 역시 개항 이후 지리멸렬하고 혼란에 빠진 나라였으며 1910년부터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김기협 씨는 “(뮈텔 주교의) 조선과 민족에 대한 부정적 태도가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개항 이전 천주교 박해나 개항 이후 조선 정부의 지리멸렬한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그의 교회제일주의를 합리적 노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러한 조선의 국가적 상황과 교회에 대한 박해는 조선과 교회가 서로 존중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1945년 해방 뒤, 민족국가 수립 전망이 떠오르면서 비로소 교회는 한국이라는 국가에 존재할 기회를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후 외세의 간섭과 이에 의존한 극우, 극좌 세력이 일어나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결국 민족국가 건설은 좌절됐다.

그는 결과적으로 1780년대 천주교 전래 이후 200년간 한반도에 건강한 국가가 갖춰지지 못하면서 가톨릭교회 역시 그 입지가 제약됐다며, “교회와 국가가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시기를 지나, 1980년대 남한의 민주화 등 사회가 바로잡히는 과정에서야 교회는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었으며, 이는 그간 정치, 사회적 맥락 안에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가 현재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불편한 세월 속에서도 자리를 잡아 객이 아닌 식구가 된 결과”라며, “이제 나라의 꼴이 더 크게 바로 잡히는 단계에서 교회의 역할은 더 커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협 씨는 계명대 사학과 교수를 지냈다.

22일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이 "해방정국, 분단 그리고 한국천주교회"를 주제로 정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정현진 기자

국가가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교회를 위해

김기협 씨의 발표에 논평을 맡은 김인국 신부는 “이제 교회의 역할이 더 크기를 염원하는 세상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으며, 무엇보다 그것이 교회의 본분”이라고 동의했다.

김 신부는 바깥사회를 외면하고 교회에만 매달렸던 뮈텔 주교의 집념 위에 김수환 추기경과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취가 이뤄진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그러나 제국주의와 독재, 분단과 냉전의 시대가 마감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은 뮈텔의 사목모델과 김수환의 사목모델 모두 극복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또 그는 “어쩔 수 없이 교회는 국가 안에 자리 잡아야 하지만,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람’ 안에 터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1820년대 조선에서는 김대건, 최양업, 최제우와 같은 서학과 동학을 책임질 중요한 인물들이 태어났고, 일각의 의견대로라면 이들은 천주실의를 읽고 구도와 개벽을 위한 새로운 방향을 발견했다며, “서학에 맞선 동학이 창도된 것은 서학이 한울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선교사를 앞세워 군함으로 침공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당시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된 지옥의 시대에 가장 진보한 철학으로 사람이 누구인지 대답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게 한 일군의 무리는 바로 ‘동학’이었다”며, “조선의 천주교회가 궁궐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에 성당을 지을 때, 국가가 아니라 사람 안에 둥지를 마련한 동학은 오늘날 김대건과 최양업의 후손들에게 빛나는 영감과 영성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의 한국 교회, 무엇을 위해 나섰나?”

이어 김선필 씨는 광복 이후 남북 분단 상황의 교회 역할을 살폈다.

1945년 8월 15일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은 서울역 앞에 도열했고, 노기남 주교는 소련군이 묵을 예정이라는 프랑스 영사관에 전화를 걸어 소련군 장군을 예방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 소문으로 드러나고 미군이 들어오자, 명동성당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걸렸다.

일본 패망 직전 신자들,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의 서자에서 적자로 인정받는 것”이라며 적극적 참전을 권유한 교회는, 해방 뒤 친일파 처단의 목소리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을 길로 선택한 것은 “새로운 점령자와의 친분”이었기 때문이다.

또 일제강점기 대량의 토지를 사서 이를 바탕으로 선교를 했던 천주교회에게 해방정국에서 급박하게 진행된 사회적 쟁점인 ‘토지개혁’은 그 어느 방식이든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토지를 빼앗길 수도, 여론을 무시할 수도 없었고, 친일, 지주세력과 함께 낙인찍힐 수도 없었던 교회는 처음에는 토지개혁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지만, 1946년 북한에서 진행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으로 교회 토지가 몰수당하자, 이에 대한 불만을 북한 당국에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북한은 교회에게 공산주의의 화신, 악마가 되었고, 그 불만은 반공주의 이데올로기가 됐다. 이런 입장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 나섰고, 교황청 역시 남한에만 교황사절을 파견하는 등 단독정부 수립을 국제사회가 승인하도록 힘썼다.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교회의 태도는 한국전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북진통일에 적극 찬성하고, 교회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 교회에게 한국전쟁은 ‘성전’이었다.

김선필 씨는 한국 천주교회가 한국전쟁에 앞장선 이유에 대해, “친일파라는 사회적 낙인을 지우기 위한 노력,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한 반발심, 당시 천주교회에 만연한 반공주의가 다른 정치, 사회적 요인과 결합된 결과, 제도 중심적 교회관 반영” 등으로 파악했다.

그는, 이 같은 교회의 태도와 역할은 “교회가 처했던 수세적 위치를 애국세력으로 전환, 구호 활동 등에 따른 한국 사회 내 주류 종교로 탈바꿈”과 같은 이미지 쇄신을 얻었지만, 반면, “전쟁 참여에 따른 교회 인명과 북한 지역 교회”를 잃었으며, 무엇보다 교회가 한반도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남한만의 정부 수립과 국제사회 승인 과정에서 보여 준 천주교회의 모습은 일면 칭찬받을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남북분단을 가속화, 공고화시키는 데 일조한 것은 틀림없다”면서, “특히 한국전쟁에서 교회가 보여 준 반공주의적 태도는 결과적으로 남북간 이데올로기 대립을 심화시키고, 동족 간 적대감을 강화시키는 데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며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오늘의 한국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이 비판하는 성장주의 버렸는가?"

그는 당시 교회의 기회주의적이고 폭력적인 모습도 당시에는 정당화될 수 있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기준을 소급적용할 수 없다면서도, “교회는 광복 이후 분단 과정에서 보여 준 자신의 모습에 대해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교회가 해 온 한반도 평화구축을 위한 두드러지고 새로운 역할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라 그 노력 안에 담겨 있는 교회의 진정성을 더욱 빛나도록 하기 위해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늘, 여기에서 교회의 세상은 무엇인가"

김선필 씨의 발표에 대해 나승구 신부는 혼돈과 혼란의 상태에서 교회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했던 선택이 오늘날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오늘도 우리는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지만 이 교회는 믿는 이들만을 위한 교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의 세상은 교회가 품어 안을 수 있을 만큼의 세상”이라며, “(현재의 교회도) 세례를 받은 이들만 안전하고 평안한 세상을 구가하는 것이 사목의 목표”라고 성찰했다.

나 신부는 “남북의 정상이 만나 손을 잡는, 평화 공존의 시대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각계각층의 눈길은 서로 다른 계산을 할 수 있으며, 국제관계 안에서도 첨예하게 자신의 이익을 산출할 것”이라며, “이 가운데 교회의 관점과 선택이 또 다시 과거의 어리석음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평화의 세대를 이루는 데에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하는 종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해방정국과 분단, 한국전쟁에서 가톨릭교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성찰하고 평화의 시대 새로운 역할을 모색했다. ⓒ정현진 기자

“화해라는 사명을 위해 먼저 교회 안의 화해, 참회 필요”

마지막으로 강주석 신부도 분단과 한국전쟁에 비춰 교회를 성찰하고, 교회가 공산주의 세력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분석했다.

강 신부는 교회는 용서와 화해,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치지만, 상대를 악마화하고 ‘적’을 살해하는 전쟁에 참여했던 어두운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비난과 단죄가 아니라 죄 앞에서 화해를 중재하는 교회의 사명을 위해 먼저 자신부터 화해에 이르러야 하며, 화해를 위해서 먼저 참회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분단과 한국전쟁 전후, 남한 가톨릭교회는 미군정의 적극적 지원 속에서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미군정으로부터 ‘반공 가톨릭’으로 인정받았다고 설명했다.

강 신부에 따르면, 당시 남한 그리스도인들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적이거나 좌익에 가까웠으며, 종교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평화통일이나 토지개혁에도 찬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미군정과 정부수립 기간을 거치며, 그리스도인들은 극우적 정치성향을 띤다. 주요한 원인은 “박해를 피해 38선을 넘어온 월남자들의 유입과 영향”이지만, 남한에서도 좌익에 대한 적대감이 고조되면서 신자들도 공격을 받는다. 남한 그리스도인들은 비공식적 폭력이라는 박해 경험으로, 북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을 배제한 정권 차원의 박해로 우익화됐다. 그리고 북한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1949년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가톨릭 일부 성직자와 많은 신자들이 남으로 내려오고, 남한의 가톨릭교회는 월남한 이들을 적극 수용한다.

이들의 월남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죽음을 감수했다는 차원에서 높이 평가됐고, 이들을 박해한 북한 정권의 만행은 부각됐다.

강 신부는 해방 뒤 한반도는 보편교회와 한국 가톨릭교회, 미국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가 발전하고 구현된 하나의 장이었다고 평가하고, “한국 가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은 보편교회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미국 가톨릭교회의 반공주의를 수용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상황를 드러내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미국 선교사이자 고위 성직자인 메리놀회 패트릭 번 주교로, 그는 1948년 한 서한에서 “(일본에 구축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방파제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다.

번 주교가 초대 교황사절로 임명돼 한국에 왔던 1947년, 분단이 현실화되는 상황에서,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부는 남한에서만이라도 반공주의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힘을 쏟았고, 번 주교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적극 찬성했다.

이들에게 한국전쟁의 원인은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였다. 한국 가톨릭교회 지도부에게 한국전쟁은 ‘악마적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성전’에 가까운 것이었고, ‘악마의 세력’에 무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했다.

강 신부는 “전쟁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입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었고, 교회에게 전쟁은 가변적이고 다층적 성격을 가진 것이었지만, 1, 2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는 ‘정당한 전쟁’에 대해 깊게 성찰했다”며, “보편교회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한국전쟁에 직면한 한국 가톨릭교회는 이 전쟁을 단호하게 ‘성전’으로 규정했고, 신자들의 참전을 독려했을뿐 아니라 교회가 주도적으로 ‘가톨릭 부대’를 조직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해야 할 교회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구실이 필요하고, 전쟁을 지지하기 위한 더 큰 ‘선’이라는 명분이 필요하다”며, “그 명분을 위해 당시 교회 지도층은 전쟁의 당사자인 국가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신앙인의 사명이라고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국가의 침략전쟁 수행에 무비판적으로 협력했던 경험, 공산주의에 대한 절대적 증오는 한국 가톨릭교회가 무력 사용에 대해 종교적, 신학적 성찰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며, “이 때문에 해방공간에서 난무했던 ‘성전’이라는 용어가 한국전쟁에도 아주 쉽게 적용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함께 한국전쟁은 ‘순교담론’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며, “교회와 신자들을 지키기 위해서 희생을 감수한 목자들의 순교영성을 기리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박해한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를 강화하는 담론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강 신부는 “교회의 가장 근본적 사명은 평화를 위한 성사가 되는 것이지만, 20세기에 격화된 이념갈등과 냉전은 교회가 평화의 중재자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제약이었다"며, “폭력의 경험이 교회를 위협했고, 갈등은 불가피했을지 모르지만, 대규모 폭력과 전쟁의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가 세상의 평화가 아닌 ‘교회의 평화’에 집착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지만 분단된 이 땅에는 아직 냉전의 잔재가 남아 있다며, "지금 우리 교회는 평화를 위한 교회의 사명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역사의 가르침을 고민하며, 어쩌면 불가능해 보이는 ‘지상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한다. 평화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앙“이라고 말했다.

패트릭 번 주교는 1922년에 미국의 메리놀외방선교회가 평안도 지역의 선교를 맡으면서 한국지부장으로 한국에 와서 1927년에 초대 평양지목구장이 됐다.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1947년에 초대 주한 교황사절로 다시 한국에 왔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피난하지 않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이 후퇴할 때 끌려가 “죽음의 행진” 끝에 중강진 부근에서 죽었다. 한국 주교회의는 그를 평양교구장 '홍용호 주교와 그의 동료 80인'의 하나로, 근현대 순교자로서 시성시복을 추진 중인데, 대부분은 한국전쟁 즈음에 희생당한 이들이다. 홍용호 주교는 1949년에 납치됐으며 그 뒤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교회 내 한국전쟁 상처,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논평을 맡은 김연수 신부는 해방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가 공산주의에 대응했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 차원에서 보편교회와 공산주의가 관계를 맺었던 역사적 측면과 공산주의가 처음 한반도에 유입되었을 때, 한국 가톨릭교회의 대응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보편교회는 1848년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기 전부터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고했고, 1846년 교황 비오 9세도 공산주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을 “양의 옷을 입은 늑대”로 비유했다며,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교황 회칙을 통해 사회교리로 확립됐고, 레오 13세 교황이 즉위한 1873년 이미 회칙으로 ‘공산주의는 악’이라는 입장이 분명해진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같은 역대 교황들의 반공주의 정책을 이어받은 한국 가톨릭교회 역시 일제 강점기부터 국내 민족주의 노선과 연계된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의 교회 침투를 막고 이를 배격했다"며, 이 같은 태도는 1951년 휴전 교섭의 상황에서도 “멸공통일, 정전협상 반대”로 이어졌고, 이는 신자들 안에 반공주의를 깊이 내면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김 신부는 남한 가톨릭교회 안에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입은 피해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 있다며, “남한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이 상처를 극복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또 그는 정교분리 원칙에도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기 교회가 적극적으로 정치에 협력하면서, 공산당 정권에는 비협조적이고 비판적 태도를 일관했다며, “교회는 어느 정도까지 정치적 부분에 개입해야 하고 중립을 지켜야 하는가”를 성찰할 문제로 제안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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