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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하느님을 만나러 사막으로 가야 합니다[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사회와연대, 2017, 29-30, 31쪽.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의 본성과 자신을 움직이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구분하려면, 모든 외적인 일들과 아무 소용이 없는 집착과 자기애와 자기 뜻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많은 것들을 알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신을 알고 자신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 모든 과학에 심취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하고 말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1090-1153)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애나 다른 동기 때문에 자신을 모르고 있으면 자기 내면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아가서(1,8)에서 “여인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이여 그대가 만일 모르고 있다면 양 떼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양치기들의 천막 곁에서 그대의 새끼 염소들이 풀을 뜯게 하오.” 하고 말했듯이 자신의 삶과 성인들의 삶을 비교하고 자신을 안 후 자기 뜻에 따라 살지 말고 성인들을 본받고 살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무사안일과 욕정을 버려야 하며 이웃이 쉽게 외적인 행복을 얻게 하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하여 봉사하는 데 바쳐, 즉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하고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본보기가 되고 끊임없이 사랑하여, 이웃을 돕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계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3,34-35)
그리고 바오로 성인도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기 때문입니다.(갈라 6,2)
그리고 창세기(43,3)에서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너희 아우와 함께 오지 않으면, 너희는 내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가서(7,12-13)에서도 
“오셔요, 나의 연인이여 우리 함께 들로 나가요. 시골에서 밤을 지내요. 
아침 일찍 포도밭으로 나가 포도나무 꽃이 피었는지 꽃망울이 열렸는지 
석류나무 꽃이 망울졌는지 우리 보아요. 
거기에서 나의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겠어요.” 하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위한 사랑이 다른 모든 사랑보다 더 커야 하며
우리는 몸과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일찍이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이는 없어지고 마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하느님에게만 전념하라는 뜻입니다.
즉 여러분이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
우리는 마땅히 집착을 버리고 영성을 찾아 사막으로 가야 하지만 세상에 대한 집착과 죄를 거의 버리지 못하여 그렇게 할 엄두도 못 내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두 종류의 사막이 있는데 하나는 ‘좋은 사막’이고 다른 하나는 ‘좋지 않은 사막’입니다. 후자인 ‘좋지 않은 사막’이란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고 자비심과 하늘나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영혼의 성전에서 더 이상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있고 이스라엘 집안의 양, 즉 좋은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하느님의 길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이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옥한 사막’은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 욕정으로 혼란스러운 마음과 탐욕과 세상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곳입니다. 여전히 때때로 몸과 마음의 욕정을 느끼기는 하지만 행사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사막’에는 폭풍이 불지 않고 내적 평화만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내려놓는 곳이 좋은 사막이다. (이미지 출처 = goodfreephotos.com)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현대인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알고,
하느님의 응답을 들을 수 있는 곳은 침묵과 고독 즉 사막뿐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옛날의 수도자보다 더 이러한 침묵과 고독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하려면 침묵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언제나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몸으로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공감하고 친밀하게 느끼고, 무한한 자비를 베풀려면 무엇보다도 침묵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기 위하여, 또 집이나 음식뿐만 아니라 마음과 육신과 영혼까지 내어줄 수 있으려면 먼저 침묵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지 않아도 되는, 자기 자신의 밤의 어둠을 좋아하는 ‘도피의 침묵(silence of escape)’을 하면 안 됩니다.

‘회심(回心, conversion)’은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즉 회심은 ‘도망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길을 바꾸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합니다. 회심은 결코 도피가 아닙니다. 소리 없이 여러 겹으로 된 문을 하나씩 닫고 아무 대화도 하지 않고 문이 없는 공동체를 이루지 않으려고 도피하는 것입니다. 영성적인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몰래 도망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을 활짝 열고 사랑의 침묵 속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만큼 완전한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아무도 모르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분노나 적개심과 거부감이 가득 차 자신의 영혼이 시들게 됨으로써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침묵은 막말을 하고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보다 천 배나 더 나쁩니다. 이런 침묵들은 악마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침묵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게 만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사랑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타인의 인격의 가장 깊은 핵심에서 인간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뿐더러, 단지 사랑이라는 영적인 행동에 의해서만 사랑하는 사람의 본질적 특성과 특질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든(1907-73)은 나치의 폭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간 독일 태생의 엘리자베스 메이어(1884–1970)에게 보낸 편지 "New Year Letter 제3부"에서 비겁하게 침묵만 지키고 있는 민중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성직자 우월주의가 팽배해 있는 우리 교회와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죄악시하고 있고 ‘진실은 없고 사실만 있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진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거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에밀 졸라가 말했듯이
매일 실패와 혐오감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하루를 시작하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점점 더 험악해지고
우리 모두 길을 잃고 매일 날씨처럼 변덕스럽게 길을 바꿀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볼멘 목소리로
‘우리 모두 진심으로 죄를 고백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된다’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단합하지도 못하여 아무런 힘도 없으므로
“나에겐 다스릴 권리가 있다”든지
“내 안에 있는 도덕심을 보라” 하고
아무도 감히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일치는
서로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누구에게나 만족을 주고 싶은 소망이 있고,
충족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 고유한 개인이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거인도 신도
난쟁이도 아니고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 모두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 있기 때문에 살 수 있지만
우리가 갖게 된 힘은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
우리 모두 춤추다가 넘어졌고,
오래전부터 터무니없는 잘못을 범해 왔지만
항상 그대처럼 용서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 우리는 매일 잠자거나 일할 때
이웃과 함께 살고 함께 죽고 있으며,
사랑은 도시와 사자 굴을 다시 밝히고
세상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젊은이들을 방황하게 만듭니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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