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사회와연대, 2017, 21,23-24쪽.

대림 시기는 4000년 동안이나 예언자들이나 성인들이 어둠 속에서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앉아 비할 데 없는 열정으로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면서도 한숨짓기도 하고 하느님께 “오, 당신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땅으로 내려오시기를 비나이다!” 하고 울부짖었던 때이기도 합니다.(이사 64,1)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시려는 주님의 장엄한 등장으로 구약성경의 모든 사건과 모든 징표는 끝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 은총의 법에 따라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가 받으려고만 하면 선물과 부를 넉넉히 주시려고 하시는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항상 찬양합시다. 거룩한 사도는 우리를 죄의 잠에서 깨어나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로마 13,12-13) 따라서 아무 죄도 없던 우리가 어떻게 죄악에 빠져 넘어졌고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

인간은 두 가지 방법으로 천사처럼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자신에게 상처를 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원수까지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어 있더라도 천사들이 하는 것처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천사들이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에게 봉사하듯이 이웃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인내하시면서 다른 덕들도 키워 나가셨던 우리의 구세주를 본받아 순종하는 버릇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처럼 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겸손하게 되고 자기를 버리게 되고 기쁘게 참고 견디게 되고 마음이 가난하게 되고 자비심을 갖게 되어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원수들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하시기도 하지만 수많은 고통스러운 시련들을 주시어 참고 견디게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수많은 시련을 겪게 하시는 까닭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시련을 주신 이유를 생각하게 하시어 고통 받게 하여 묵상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께서 무거운 짐을 지게 하셨는지 자신에게 물어보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시련들을 통하여 어디로 가든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가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것은 자기와 모든 피조물을 버리고 참고 견디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2살의 젊은 키르케고르(Soren Aabye Kierkegaard, 1813-55; 그 당시 코펜하겐 대학생)는 해변 휴양지 길렐라이에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1835년 8월 1일에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태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겼습니다. “앞에서 내가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은 고작 사물들의 겉모습을 보고 사실을 말하는 정도였지만, 이제 나의 삶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을 새롭게 가지려고 하자 모든 사물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이가 주변 환경에서 사물을 식별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수동적인 측면에서만 사물을 식별하고는 ‘모든 것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동안 나의 영적인 세상에서도 모든 것이 반복하여 같은 모습만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나는 더욱더 마음의 평화를 갖고 다른 목표를 향하여 정열을 기울여 새로운 면을 보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불안함을 없애기 위하여 한동안 노력했지만 냉수를 마시고 안정을 되찾은 후에는 어김없이 열병처럼 더 심각하게 다시 불안감이 엄습했다.

진정으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행동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나에게 바라시는 것을 알고 나에게 소중한 진리를 깨닫고 ‘내가 진심으로 살고 죽기를 바라는 이념(理念, Idea)을 찾아내고’, 나의 운명을 의문을 갖고 바라보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만약 내가 이른바 객관적인 진리만 알려고 하거나, 모든 철학을 연구하고, 그것들을 비평할 수 있게 되어도, 그것은 내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게 마련이다. 또 이론에 밝아 모든 지엽적인 문제에 답할 수 있어도 나의 주관을 정립하지 못하고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 비록 내가 수많은 의문에 대하여 모두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교 신학을 해박하게 안다고 해도 그것이 나 자신에게나 내 삶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내가 모든 진리를 알고 있지만 내가 그 사실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 관계없이 진리를 실천하지는 않고 불안에 떨고 있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아직도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고 누구나 지식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순전히 지식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아프리카의 사막이 물을 갈구하듯이 나의 영혼은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진리를 갈구하고 있다. 내게 부족한 것은 내 삶에 도움이 되는 진리인데, 이는 내가 집도 빌리고 가구를 다 마련해 놓았지만 고락을 함께할 반려자를 만나지 못한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를 발견한다고 해도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 자신을 발견한다고 해도 아직 세상 속으로 뛰어들기에는 부족하기만 하다.

.… 나는 진리 안에서 살려고 하지 않고 끝없는 쾌락의 바다에 안주하려고 했다. 나는 끊임없이 나를 붙드는 쾌락에 굴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불순한 열정이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또한 끊임없이 따분함도 느끼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나는 지식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난 다음 자주 그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잠깐일 뿐이었으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직도 지혜의 잔으로 마셔 본 적은 없지만 끊임없이 지혜를 찾아 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 친구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 그래서 나는 여태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조용히 나 자신을 성찰하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왜냐하면 철부지 아이가 처음으로 의식적으로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듯이 이렇게 살아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참 나’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행착오 끝에 발견한 나의 길을 서둘러 가면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룻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으로는 험준한 비탈길만 만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말하려고 한다.”

바티칸 성 베드로광장의 베드로상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세상에 안전한 피난처란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도 악의 어두움이 우리에게 비춥니다. 악이 스며들 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어두움을 탓하든지 촛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경은 악인과 죄인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지 악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신다고 했지 악인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선한 분은 아버지 한 분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악한 사람들입니다. 소위 악인들입니다. ‘마음씨와 하는 짓이 나쁜 사람’을 ‘악인’이라 하고 ‘죄를 지은 사람’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 곧 원죄로 인한 모든 인류’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느냐 않느냐에 따라 악인과 죄인이 구분됩니다. 곧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 죄인이고 자신의 죄를 부정하면 악인입니다. 교회에는 회개한 사람이 드물고 악인들만 득시글거리고 있습니다. 악인인 주제에 인간인 척하면서 위선을 부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못한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습니다.(마르 8,33)

이때만 해도 베드로는 성령을 받지 못하여 하느님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고통을 받지 않으므로 고해성사를 할 일도 없습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사는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반대로 죄인은 죄의식과 죄책감으로 몹시 괴로워합니다. 하느님의 은총 가운데 가장 큰 은총이 죄의식이고 죄책감이고 양심의 가책입니다.

이 은총 때문에 회개가 이루어지고 천국이 가까이 오게 되고 구원과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십니다.


오든(W. H. Auden)은 "불안의 시대"(The Age of Anxiety)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스승과 예언자는 멀리 내다보고
혼란과 악이 팽배한 날이 올 것이라고 우울해 하고 있다.

....
그러나 시인들의 고결한 절망은 그런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역사(役事)들을 거부하고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지도 않고
‘나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사악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던가?’하고 울부짖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변화하려고 하지 않고 파멸하려고 하고 있었다.
우리는 매 순간 십자가를 오르려고 하지 않고
환상을 죽게 하지도 않은 채로
두려워서 죽으려고만 하고 있었다.
….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아 온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 순리를 저버리고 살려고만 하고 있었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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