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사회와연대, 2017, 1017-1020쪽.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루카 11,3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피 흘리지 않고 순교한 사람들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그들의 영웅적인 그리스도인의 덕행을 통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습니다. 그들은 덕행을 하여 본보기를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버리고 육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수많은 수행을 보여 주면서 영성을 겉으로만 보여 주려고 함으로써 그들이 바랐던 삶의 변화는 전혀 없었던 사람들이 많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금식을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수많은 기도를 하고 자주 고백성사를 보고 영성체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고 많은 자선을 베풀고 대사부를 부지런히 남발하며 이 밖에도 거룩한 일을 많이 했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덕행을 보여 주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때문에 힘을 쏟아 부었지만 하느님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들도 길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외적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는 척했지만 내면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제하면서 완덕을 쌓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덕을 쌓기는커녕 덕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덕을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전혀 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제멋대로 육의 삶을 살았으므로 제대로 수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이가 들수록 불안해 하며 참지 못하고
더욱더 나쁜 말을 하고 나쁜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영성이 매우 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지나치게 거룩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서 기쁨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막연하게 내공을 쌓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수행만 바꾸어 가면서 했습니다. 그러나 자위는 했지만, 전혀 덕을 쌓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안정하게 되어 무슨 일이든지 오래 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영성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렸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무도 마귀를 섬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귀를 주인으로 섬길 정도로 야비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하튼 하느님을 외적 수행만 하면서 섬기게 되면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에는 외적 수행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내면생활을 하면서 죄를 짓지 않아야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도원에서 외적 수행을 열심히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리고 속세에서도 금식을 하는 등의 고행을 하면서
자선을 베풀고 살지만, 진심으로 베풀지는 않고 사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이들은 죄를 짓지 않고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의무를 다하지 못해 수행은 열심히 하지만 아직도 화를 잘 내고
시기심이 많고 교만하고 돌아서서 험담을 하고 칭찬받기만을 바랍니다.
이렇게 속세에 물든 사람들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은 외적 수행만 열심히 하면
의롭게 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들은 금박을 입힌 조각상에 비유할 수 있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알맹이는 돌이나 나무입니다.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겉으로 아름답고
속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로 채워진 무덤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마음을 정화하여 나쁜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금식하거나 기도하거나 다른 외적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구원받지는 못한다고 믿습니다.

수도원에서는 규칙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도 있습니다. 수도원에서 요구하는 규칙에만 충실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수도원 규칙이 너무나 많고 많은 일을 해야 하고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쉽게 할 수 있고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하느님께로 가는 바른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수도원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규율을 만들어 특히 외적 수행을 강요하므로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현명하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외적 수행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완덕을 갖추려면
어떻게 말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지식이 부족하여 길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니며
수행을 게을리 했기 때문에 길을 잃는 것도 아닙니다.
깨달으려고만 했다면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자 (이미지 출처 = Pxhere)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습니다. “그대는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대 마음대로 하십시오.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을 하십시오.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는 타락하고 말았으므로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하느님을 보고 깨닫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려면 자신의 꼬락서니를 알고 자신을 정화시켜야 합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처럼 자기를 죽이지 않은 채 맹신하는 것은 미신을 믿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자신뿐입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변화하도록 설득할 수는 없으며 누구나 오직 내면에서만 열 수 있는 변화의 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논쟁이나 감정적 호소에 의해서도 다른 사람의 변화의 문을 열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반드시 절망으로 인도하게 됩니다. 고통이 우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고 있지 않다면 필히 타락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평온을 비는 기도(The Serenity Prayer) 

라인홀드 니부어(Karl Paul Reinhold Niebuhr, 1892-1971)/ 후고(後考) 옮김


하느님, 제 마음에 평정을 주소서.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 주시고

제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

이 둘을 구별해 내는 지혜를 주소서.


(하루를 살아도 한껏 살게 해 주시고
한순간이라도 삶의 의미를 알고 살 수 있게 해 주소서.
시련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해 주시고
죄 많은 세상을 제 방식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셨듯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해 주소서.
주님의 뜻에 저가 순종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세상만사를 잘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 주소서.
그리하여 저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는 적당히 행복하게 해 주시고
저 세상에서는 주님과 더불어 더할 수 없는 행복을 영원히 누리게 해 주소서.)

아멘.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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