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사회와연대, 2017, 344-347쪽.

그때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요한 10,22-28)

시편 저자는 이 모든 것은 솔로몬의 성전에서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처소는 평화로웠다.”(시편 76,2)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평화로운’이라는 의미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솔로몬이시므로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즉 내적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들어가시는 성전은 깨끗한 영혼, 내면생활을 하는 영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다른 영혼보다도 그런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며 더 정성껏 돌보십니다. 이 성전에서 성전봉헌 축제, 즉 부활의 축제가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영혼에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시기 좋아하시는 그 깨끗한 성전에서만 부활 축제가 열리게 됩니다.

우리는 쓰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을 ‘새 것’이라 부르며 사람의 경우에는 자신의 내면으로 눈을 돌려 진심으로 자신의 영혼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새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사람’은 거기서 영원한 진리이신 하느님께서 계시면서 역사하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육감으로 느끼지는 못하며 이성으로도 느끼지 못하며 읽고 들은 지식으로도 알지 못하며, 오로지 하느님의 영향을 맛보고 느끼는,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샘솟고 있는 영혼의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의 역사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샘은 물탱크보다 좋습니다. 물탱크에는 불순물이 쌓이게 되고 말라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샘은 항상 깨끗한 새로운 물을 분출합니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수천 번 영혼 안에 들어가는 사람의 영혼의 성전 안에서는 참된 성전봉헌 축제, 즉 쇄신의 축제가 열리게 되는데, 성전봉헌 축제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뜻과 새로운 빛과 새로운 은총과 새로운 덕이 주어집니다. 외적 수행과 선한 일들과 함께 마음을 정화하게 되면 완덕의 은총을 주시니, 이렇게 내면으로 눈을 돌리게 되면 얼마나 유익하게 되겠습니까? 이런 내면의 정화 없이 외적 수행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열정적인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쇄신하지 않고 고행만 하려고 합니다. 

“때는 겨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겨울이었을까요? 마음이 점점 차가워지고 마음에 은총이 없고 하느님도 계시지 않고 거룩한 것도 없는 때를 ‘겨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을 맛보려는 사람들은 눈과 서리 때문에 우울해 합니다. 눈과 서리가 영혼 안에 있는 성령의 불을 꺼 버리기 때문입니다. 눈과 서리가 냉정한 마음 때문에 은총의 샘을 얼게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눈과 서리는 영적 위로를 받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과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겨울’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겪는 겨울입니다. 그는 하느님만 생각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아무 죄도 짓지 않으려고 조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냉담하게 되고 마음이 우울하게 되고 어둡게 되고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영적 달콤함을 전혀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도 아버지의 버림을 받으시고 아버지의 도움도 받지 못하신 영적 겨울을 겪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수난을 받으시는 동안에도 신성은 잃지 않으셨으나 인성은 간절히 바랐지만 전혀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버림을 받으시고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시고 가장 괴로워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당신의 이런 수난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친구들에게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다른 겨울’을 맞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버림을 받은 것 같아도 기뻐하며 느긋하게 참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목자이시고 자신들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음속으로 꾹 참고 행동에서도 참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주님을 따르는 것을 너무 좋아하다가 절망하고 하느님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로부터 버림을 받은 듯한 겨울을 맞게 되면, 하느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며 여름에 은총을 받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총을 받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절망과 어둠과 영적으로 얼어붙은 겨울 속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깊은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겨울. (이미지 출처 = Unsplash)

귀용 부인(Mde Guyon, 1648-1717)은 "Justifications" 265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겨울은 순례 길을 걷는 우리에게 축복의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겨울은 우리의 불완전함을 제거해 주는 정화 작업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변함없이 피조물에게 충만하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만 피조물의 불완전함만 보고는 전혀 작용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화 작업이 계속 진행됨에 따라 그 효력이 영혼 깊숙이 들어가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던 결점들을 드러내게 하십니다. 겨울이 나무에 미치는 영향을 보면 하느님의 이런 작용을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는 겨울이라는 계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를 깨닫게 하는 훌륭한 계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 사라지기 전까지 우리 모두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결함투성이의 본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날이 반드시 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정결하게 만드시기 위해 오시는 날, 자신을 아름답게 덮어 주었던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한 존재는 본질적 품성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진 장점을 잃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잃은 것은 단지 지극히 인간적인, 자신이 선하다는 외면적 의식일 뿐입니다. 대신 그는 처절할 정도로 비참한 자신의 상태를 깨닫고 주님을 편하게 따르려던 안일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편안함은 무엇보다도 자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벌거벗고 상처받아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모습 그대로 드러내게 됩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결함을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가려져 있었고 외적 덕목들로 숨겨져 있었던 결함들이 적나라하게 볼썽사납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 상태를 ‘무아지경(無我之境, ecstasy)’이라고 말하는데, ‘자기를 완전히 버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며 그리스어 ‘ek stasis’는 자신의 바깥에 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결코 무아지경을 맛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찬양기도를 할 때에는 무아지경에 있게 됩니다. 이른바 자기가 없는 경지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무아지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 황홀경을 느끼는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무아지경은 정반대이며 하느님을 찬미 흠숭해야만 맛볼 수 있습니다.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오'(We Have Not Long To Love)

테네시 윌리엄스(Tennessee Williams)/ 후고(後考) 옮김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오.

행복했던 시절은 머물러 있지 않는다오.

그런데도 고운 옷들처럼 장롱 속 깊이 간직하기만 하고

 

평상시에는 허름한 옷들만 꺼내 입으려고만 한다오.

나는 그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머리만 빗고 있는 것을 자주 보았소.

 

나는 적막을 깰 수는 있었지만

어둑하고 따스한 그 고요함에 익숙하여

애써 깨려고 하지 않았소.

(거의 들리지 않는 속삭임마저도

적막을 깨어 버리기 때문이오.)

 

순간들은 머물고 싶어 했지만

지나가 버리고 말았소.

사랑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오.

단 하룻밤도, 단 하루도 머물러 있으려고는 하지 않는다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