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처럼 - 김유진] ‘레이디 버드’

'레이디 버드', 그레타 거윅, 2018. (포스터 제공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성장소설, 성장서사라는 용어가 있듯 10대의 성장담은 오랫동안 문학과 영화에서 종종 만나왔던 이야기다. 이야기의 최종 목적지는 늘 ‘성장’이라는 낯익은 장소인데도 성장담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뭘까. 우선 성장 과정에 있는 젊은이에게도, 그 과정을 지나온 나이든 이들에게도 각각 다른 빛깔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신체 나이나 인격 성숙의 정도에 상관없이 누구나 성장 과정 중에 있기 때문 아닐까. 늘 모자라고, 부딪히고, 무너지고, 죄와 잘못을 저지르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다짐하면서.... 매일의 일상과 일상이 더해진 삶의 과정을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행위는 분명 ‘성장’을 바라고 지향하며 이루어지는 것일 테니까. 그리스도교인이 추구하는 ‘영적 성숙’은 ‘성장’의 여정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2002년 미국의 작은 도시 새크라멘토에서 살아가는 18살 크리스틴의 성장담이다. 크리스틴의 아버지는 능력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지만 현재는 실직 상태다. 병원에서 일하는 어머니가 늘 야근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겨우 유지해 나간다. 그러니 가족들은 크리스틴이 집 근처의 대학에 입학하길 바라지만 뉴욕에 있는 대학으로 가겠다는 크리스틴의 의지는 확고하다.

크리스틴은 이제 곧 성인이 되려는 문턱에서 독립된 존재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먼저 이름. 부모님이 지어 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다. 언어로 존재가 규정된다고 생각할 때 자기 이름을 자기가 정한다는 건 자기 존재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결연한 다짐일 것이다.

크리스틴이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가지기 위해서는 부모를, 가정을, 고향을, 학교를 떠나야 한다. 그 과업은 시간이 흐르고 저절로 외부 환경이 변하면서 이루어지는 일로 보일지 모른다. 누구나 언젠가는 어른이 되듯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장은 크리스틴 내면에서 부단하게 단절 해야지만 가능하다. 크리스틴이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의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부모와 싸워야 했고, 이겨야 했다.

이 영화에서는 가톨릭이란 종교도 ‘레이디 버드’가 되기 위해 넘어서야 할 벽으로 그려진다. 크리스틴이 다니는 고등학교는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보수적 분위기의 학교다. 학교에서는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강사를 초청해 강의를 마련한다. 강사는 자신의 어머니가 자신을 낙태하려다 그러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며 만약 낙태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났을지 되묻는다. 한 사람이, 한 존재가 세상에 없을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겠지만 크리스틴은 그 말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지루한 강의를 듣고 있지 않아도 됐겠죠”

'레이디 버드'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유니버설픽쳐스인터내셔널코리아)

크리스틴이 친구 줄리와 바닥에 누워 제병을 먹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축성되기 전의 제병이야 여느 과자와 다를 바 없겠지만 굳이 과자가 아닌 제병을 먹고, 제병이 담긴 박스를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단지 황당한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특히 서구 문학이나 영화의 성장담에서 가톨릭이란 종교가 가정, 학교와 마찬가지로 성장을 위해 단절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묘사되는 건 낯익은 일이다. 성장담의 주인공이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설정 역시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이 설정을 단지 상징적으로 바라보지만은 않게 된다. 종교는, 다시 말해 종교의 전통과 계율은 과연 개인의 성장을 억압하는 점이 전혀 없나.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과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는 울타리가 되고 있는가.

크리스틴의 남자친구 대니는 다정하고 올바른 사람 같았지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가족에게 속이기 위해 크리스틴과 사귀는 척을 했다. 아일랜드 출신 중산층 가정, 이 독실한 가톨릭 가정은 대니의 성장과 자유를 억압하고 오히려 타인에게 끔찍한 죄를 짓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크리스틴에게 동성애자인 것을 우연히 들킨 대니는 제발 부모님께 말하지 말아 달라고 엉엉 울며 부탁한다.

지금 한국 가톨릭 교회는 크리스틴의 결단과 대니의 눈물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우리의 크리스틴, 대니와 대화하며 그들의 상처와 그들의 존재를 감싸 안는 일이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몫이다. 교회가 크리스틴과 대니를 단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이 성당 밖으로 쫓겨나지 않길 바란다. 제 발로 걸어 나간 듯 보이지만 실은 쫓겨난, 크리스틴과 대니가 우리 곁에 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크리스틴과 대니가. 

김유진(가타리나)
동시인. 아동문학평론가. 아동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에서 글쓰기를 강의한다. 동시집 “뽀뽀의 힘”을 냈다. 그전에는 <가톨릭신문> 기자였고 서강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이곳에서 아동문학과 신앙의 두 여정이 잘 만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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