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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교회의 중심에 맞서다[서평 - 구영주]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분도출판사, 2018

여성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여성주의 신학은 비판 신학이다. 비판적 연구는 철학적이든 역사적이든, 사회적이든 문학적이든 늘 모순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신학의 경우 초기 모순을 어떤 사람이 신과의 관계 속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그가 물려받은 신 이미지 또는 신학적 해석 사이의 모순과 같이 삶의 체험에서 오는 모순과 물려받은 전통이나 해석의 두 측면 사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순, 즉 지적인 것에서 비롯하는 모순으로 경험할 수 있다. 모순의 경험은 매우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을지라도, 마음이 편한 것도 유쾌한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해결을 향해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비판적 신학의 목적은 두가지다. 우리가 물려받은 해석들 중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측면들을 명백히 식별하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신학적으로 일관된 해석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흔히 차별이나 불의의 상황으로 인해 일어나기 때문에, 비판적 신학은 해방신학과 맥이 같다.

이와 함께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가끔 여성신학과 여성주의 신학을 비슷한 말로 쓰고 있으나, 같은 말이 아니다. 여성신학은 여성주의 신학과는 달리 반드시 모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비판적 관점을 갖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성은 수많은 여성적 관점들 가운데 하나의 관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여성주의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성주의적 관점은 여성과 남성 어느 쪽이든 복종이나 지배 없이, 자유롭고 호혜적 관계를 맺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또 한 가지 명확히 해야 할 점은, 여성주의 신학을 태동시키는 원래 모순이 여성의 정체성 또는 기능이나 역할을 개념화하는 방식을 언급하고 있다고 해서, 여성주의 여성 신학자나 남성 신학자가 단지 이것에만 관심 있다거나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다른 어떤 차별도 인지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여성주의 신학은 어떤 억압도 배제하지 않고,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억압인지 따지면서 서로 경쟁시키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동성애자의 억압, 여성의 억압, 제3세계 가난한 이들의 억압, 제4세계 가난한 이들의 억압, 아프리카인들의 억압, 이주민들의 억압, 이른바 ‘원주민들’의 억압, 육체적, 정신적 장애인들의 억압 가운데 어느 것이 중요한지 따지지 않는다. 예수는 “수고하고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마태 11,28)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통은 억압을 ‘이방인(이주자), 고아, 과부'(신명 24,17-22)라는 인물로 구체화한다. 이러한 대의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모든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과 같다. 대의는 하느님에 대한 충실한 믿음을 삶 자체에서 구체화(육화) 하는 것이고, 각각의 여성, 각각의 남성은 이것이 자신에게 뜻하는 도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김항섭), 분도출판사, 2018. (표지 제공 = 분도출판사)

수 세기에 걸쳐 신학을 했던 여성들, 곧 자신의 믿음을 지속적이고 체계적 방식으로 성찰했던 모든 여성들을 오늘날 복원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여성주의 신학의 과제 가운데 하나다. 여성주의 신학은 그 철학적 관점에서 ‘왜’에 대하여 질문한다. 다시 말하면 ‘왜 여성의 지적 공헌이 역사에서 묻히는 경향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당대의 규범이나 종교가 규정하는 바와 같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거나 깨려고 노력하는 모든 여성을 다 여성주의라 부를 수는 없다. 여성주의자라는 말은 문제가 특정 개인이나 고유한 상황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을 전제한다. 크리스틴 드 피장,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비구니 선사 말산요연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를 시대를 앞서간 여성주의자라 부를수 있다. 이들은 여성의 문제를 자각하고 이 문제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보여 준 작품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아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와 비구니 말산요연, 아빌라의 데레사를 여성주의 신학자로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여성의 문제를 자각하고 여성의 예속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신학에 헌신했고, 하느님의 뜻 그리고 자신이 속한 종교의 진정한 전통의 뜻은 이러한 예속에 반대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만일 남성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들과 같은 성(sex)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명예롭게 느낀다면, 이성은 단순히 품위라는 것을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어야 한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여성이었다면, 낮과 밤 아무 때나 집을 나서,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고 군중과 섞여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주의 신학의 역할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주의 신학은 하느님이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이 여성을 남성보다 덜 영성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근대가 태동하는 시기(15-18세기)에는, 여성주의 신학은 하느님이 여성과 남성을 지적으로 동등한 존재로 창조했고, 여성이나 남성이나 각자 주어진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기대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여성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막는 분이 아니다.

근대가 강화되던 시기(19-20세기), 여성주의 신학은 하느님이 여성과 남성을 자유에서나 공적 활동 능력에서 동등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정치나 유급 직업, 사제직에 여성의 참여를 막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다.

탈근대 시기(20-21세기)에, 여성주의 신학은 하느님이 사랑에서, 또 가정 영역에 참여하는 능력에서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존재로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우선적 과업이 집안일, 아이 돌보기, 환자나 노인 돌보기라고 결정하는 자는 하느님이 아니다.

오늘날 여성주의 신학의 과제는 존엄성과 지성, 자유에서 여성과 남성이 평등하다는 생각에 머물지 않고, 사랑하는 능력에서도 평등하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는 사회를 모든 이들 가운데에 건설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유명한 문장,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말과 같이, 사랑과 자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모순이 아니고 이중도덕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적 존재의 진리에 대한 가장 간결한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오직 자유로부터 사랑할 수 있다. 오직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유가 사랑보다 앞에 있지 않으나 그렇다고 사랑이 자유에 앞서는 것도 아니다. 내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내 사랑의 척도는 내 자유의 척도와 같다. 둘의 병행은 엄격하고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랑을 갖고 있으므로 그만큼 많은 자유를 갖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변혁과 우리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는 단지 이론적 선언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각각의 여자와 남자가 이러한 진리를 실천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다.

여전히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을 철 지난 이데올로기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이 일으킨 문제의식은 유효하며 참된 종교성은 시대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해방적 실천을 요구한다고 보겠다.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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