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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투', 두 단어의 무게[오늘은 여기까지 - 박유형]

우연히 친한 언니와 옆 동네에 놀러 갔다가 전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이었다. 처음 가 보는 동네라 이리저리 주변을 돌아보면서 걷고 있는데 승합차 하나가 멈춰 섰다. '여성 안전 귀가' 전용 차량이라고 적힌 승합차 앞 좌석에 타고 있던 여자분이 전철역까지 가는 길이면 타라고 했다. 약간 망설이고 있는데 그분이 재차 권하기에 어색하게 차에 올라탔다.

전철역까지 가는 아주 짧은 시간. 분명히 '안전' 귀가 차량이고 나 말고도 여럿이 타고 있었으며 아마 자원봉사자인 것 같은 아주머니들이 다음에도 이 차가 보이면 꼭 타라고 안심시켰지만 왜인지 나는 잔뜩 긴장해 뻣뻣하게 앉아 있었다.

여성들이 긴장하는 순간이 있다. 어두운 밤 낯선 자동차가 길가에 서 있을 때, 늦은 시간 혼자 택시를 탈 때, 낯선 사람과 골목길을 걸을 때, 모르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탈 때, 누군가 불시에 현관문을 두드릴 때, 취객이 수많은 버스 빈자리 중에 꼭 내 옆에 앉을 때, 수상한 사람이 전철에서 어떤 여성에게 바짝 붙어 설 때, 길거리에서 연인이 싸우고 남자가 여자에게 소리 지를 때, 술 취한 여성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 열쇠 없이 갈 수 있는 공중 화장실을 이용할 때.... 이렇게 보면 긴장하지 않는 순간이 없고 일상생활이 가능할까 싶겠지만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와 비용을 지불한다. 자신과 동료 여성을 지키기 위해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말이다. 안전한 주거 환경을 위해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월세를 낸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얼마 전에 성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어떻게 느끼냐는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내가 여자라서 안전하지 못한 순간들이 떠올랐고, 그래서 안전하다는 감각을 항시 느낄 때까지 여성인 내가 편안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답했다. 내가 나라서 행복하고 싶고, 내가 여성이라는 정체성 또한 소중한데 지금은 내가 나라서, 내가 여성이라서 두려운 상황을 종종 맞닥뜨린다. 연일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아마 나만 이런 경험을 가지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 거라고.

미투는 '나도'라는 말이 '나도 겪었다'를 넘어서 '나도 말하겠다'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미지 출처 = Pexels)

최근 여성들이 '미투'를 외치기 시작하면서 성폭력 상담 요청이 급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다른 여성의 용기를 통해 이름 붙이지 못했던 기억들이 이름을 얻어 돌아오는 것이다. 항상 과거 어디쯤 이유도 모르게 남아 있던 찜찜한 기억들. 나 역시도 이런 기억들이 있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이 기억이 잊히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그 기억 속 순간에 나는 위험에 노출돼 있단 걸 직감했고, 그 불안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겼다. 그때는 이름 붙일 수 없었지만, 이제는 성추행이었고 성폭력이었다고 부를 수 있는 기억들. 그 기억들은 이미 지나왔음에도 이름 붙이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 재해석의 경험을 하면서 여성의 삶은 어쩌면 계속해서 쌓이는 기억에 새 이름표를 붙여 나가는 작업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여성들의 고단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투'와 관련해 듣는 말은 공작이라느니, 폭로는 피해자를 위한 일이 아니라느니, 꽃뱀이라느니, '미투' 운동의 변질이라느니 하는 소리다. 단 한 번이라도 피해 여성의 처지에서 생각해 봤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삶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 인간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일상이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것일 텐데, 가장 안전해야 할 일상이, 학교가, 일터가, 가정이 지옥과 같았던 사람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미투'가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까닭은 '나도'라는 말이 '나도 겪었다'를 넘어서 '나도 말하겠다'라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가 '미 투'라는 두 마디 말의 무게를 알기를 소망한다. 이 두 마디 말에 담긴 결심과 두려움의 무게, 수치심과 죄책감과 자기 의심, 자기 혐오의 무게를 말이다. 누군가가 ‘나도’라고 말할 때 우리가 먼저 취해야 하는 태도는 의심도, 판단도, 심판도 아니라 함께 울어 주는 것 아닐까. 그 무게를 안다면, 울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분명한 것은 이것이 여성 혼자 짊어야 할 무게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을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듯, 누군가의 고통에는 온 사회가 가담하고, 그의 치유를 위해서도 온 사회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 무게를 나눠서 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러려면 먼저 결정해야 한다. 나는 누구 곁에, 무엇을 위해 함께 서 있을 것인가. 누구든지 안전하게 그 자신으로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 무게를 나눠서 질 것인가, 아니면 냉소하고 회피하며 영원히 책임 없는 듯이 굴 것인가.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은 당신에게 언젠가 꼭 올 것이고, 당신은 그에 답해야 할 것이다.

박유형
기본소득 청‘소’년네트워크에서 기본소득 운동을 하고 있다. 기본소득을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일을 좋아한다.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장래에는 잘 훈련된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이 꿈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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