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3월 4일 (사순 제3주일) 요한 2,13-25

이번 일요일의 말씀은 매우 풍요롭다. 그 중에서도 강력한 한 주제가 돋보인다. 그것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모든 신뢰를 그분께 두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은 진정한 예배를 요구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반대되는 행위다.

우상숭배와 억압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사명이 갈릴래아의 카나 혼인잔치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요한 2,1-12)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유대 민족의 권위와 처음으로 대립하는 장면을 본다. 이 일은 예루살렘,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성전(공관복음은 이 사건을 공생활의 거의 끝에 두고 있다)에서 일어난다. 과월절은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다. 주님이 성전에서 본 것은 “질투하는 하느님”(탈출 20,5)에 적절한 예배의 의미를 왜곡하여 생긴 백성들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억압이었다. 백성들은 돈에 의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로 들어간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들을 노예살이에서 해방시키는 아버지 하느님이 아니라, 억압하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있다. 백성을 사랑하고 해방하는 아버지의 집은 백성들을 착취하고 멸시하는 “시장”(요한 2,16)이 되고 있다.

성전에서 이런 시장행위가 일어나고 있는 그 배후에는 대사제들이 있으며, 그들은 점점 더 부유해진다. 사람들은 성전에 바칠 동물들을 팔고 환전상들은 로마 돈을 받고(이교도 돈으로는 봉헌할 수 없으므로) 성전에 동전을 바치는데, 이들은 단순히 중개인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성전 모습에 대한 예수님의 항의와 거부는 강력한 이득권자들을 흔들어 놓는다. 그들은 하느님을 탐욕으로 바꾸었다.(공개적으로 하느님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바오로는 이것을 “우상행위”라고 한다. 그러나 교묘하게 처음부터 시작된 이러한 바꿔치기는 종교적 논쟁에서 자주 합리화되고 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이러한 함정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오늘날 복음은 우리에게 개인 차원에서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 우리의 양심을 살펴보도록 초대한다.

'성전을 정화하는 예수', 루카 조르다노. (1675)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비둘기와 가난한 이들

비둘기들을 사고파는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분노는(요한 2,16)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성낸 이유는 분명하다. 즉 비둘기가 정화예식의 제물로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 결과, 비둘기를 가난한 이들에게 파는 사람들은 예배를 통하여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이 격노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참다운 신앙인의 태도는 그 반대가 되어야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우리 자신에게나 하느님 경배에 필요하다고 합리화하면서 가지고 있는 사치스러운 것들, 값비싼 것들을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음식, 옷, 집으로 바꾸기 위하여 팔라고 요청한다.(마태 25,31-45)

주님은 그것 때문에 죽었다. 우리도 비록 그것이 스캔들을 일으켜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1코린 1,23)를 선포함으로써 주님이 먼저 실천한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구실들과 심지어 종교적인 이유까지 대면서 우리의 탐욕을 숨길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아는 주님은,(요한 2,25) 우리가 “그분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것을”(탈출 20,7)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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