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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과 의무[구티에레스 신부] 3월 11일(사순 제4주일) 요한 3,14-21

이번 주일의 말씀은 신앙과 일, 은총과 책임은 분리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 준다.

진실한 것을 행하기

하느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그분의 아들을 우리들 사이에 보냄으로써 표현되었다. 아들의 현존은 “세상을 위한”(요한 3,16) 하느님의 사랑을 측정하는 잣대다.

예수님의 모든 움직임, 모든 말씀은 하느님의 우정을 보여 준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이 사랑을 지금 환영받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구원의 의지는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다. 그 의지는 모든 인간 존재에 미친다.(3,17) 그러나 하느님의 이 계획은 우리들의 자유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의 의지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를 단죄하는 것이다.(3,18) 그런 행위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3,19) 빛과 어둠의 이미지는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이미지다. 그리스도는 빛이고, 어둠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세계다.

요한은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빛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3,19) 행위는 믿음에 있어 기본적인 것이다. 사람들이나, 세상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은 결국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빛을 미워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은 동의어다.(3,20)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거절한다. 요한 복음서의 이 구절은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고 단호하게 결론을 짓는다.(3,21) 진실이란 단순히 생각을 바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을 포함한다. 올바른 생각은 구체적인 행위로, 결단으로, 연대로 표현되어야 한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풍요로운 자비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구체적 행동을 했던 존재를 믿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순리다. 하느님은 그분 자신의 아들을 보냈다. 이처럼 모든 인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연대가 이루어졌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행동 이외에 다른 어떤 방식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참여를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구절로 표현한다: “하느님은 자비가 풍성하다.”(에페 2,4)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생명(삶)의 선물은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의 결과다. 구원, 다시 말하자면 친교, 즉 하느님과 인간 서로 간에 나누는 우정은 우리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2,8) 은총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2,9) 이것이 바로 바오로 서간들의 중요한 주제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또한 요구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방금 요한 복음에서 이 사실을 깨닫는다. 즉 우리의 행위는 빛에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한 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바라보는 것이며, 거짓이나 핑계를 대지 않는 것이다.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들을 필요로 하는 형제자매를 만나게 될 때 연대에 의해 자비가 풍부한 하느님께서 백성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는 하느님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1역대 36,15)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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