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2월 11일(연중 제6주일) 마르 1,40-45

예수님의 기적들은 생명의 징표이며, 신체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인 것을 아우르는 생명 전체다.

주님의 연민

예수님은 갈릴래아인들이 모여 성서 읽기와 기도에 귀를 기울이는 회당에서 계속 메시지를 선포한다. 회당은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종교적 기관들의 상징이다.(성전은 유대의 예루살렘에 있다). 나병 환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존재다. 그의 질병은 테러를 일으킨다.(오늘날 우리 시대의 나병인 에이즈에 관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뿐만 아니라 나환자들은 죄인으로 취급된다. 신체적 고통 이외에도 나환자들은 사회의 낙오자들이다. 레위기의 말씀은 그와 같은 상황을 거칠게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제의 검진을 받아야 했고,(레위 13,1-2) 나병으로 판정될 경우 그들은 불결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나환자들은 도시 외곽에 홀로 살아야 했고, 그들 자신이 불결하다고 스스로 크게 외쳐야 했다.(13,45-46)

'예수와 나병 환자'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예수님께 믿음을 갖고 다가간 사람은 나환자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주님께서는 동정심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다시 말하자면, 그분은 나환자의 고통을 그분의 고통으로 삼고, 두려움 때문에 그를 피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분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고, 나환자에게 손을 뻗어 그를 만진다.(1,41) 그분은 어떤 경계도 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추종자로서 중요한 모범을 깨닫게 된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우리 자신의 고통으로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들로 삼는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어려움과 문제들을 유발시킬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비용 없이,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에 위험 없이 사랑하기를 더 선호한다.

그리스도를 모방하기

주님은 나환자의 청을 받아들이고 그에게 말한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1,41) 예수님은 사람들이 낙오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분은 나환자를 깨끗하게 하면서, 그의 육체적 몸을 치유하고 사회 속에 그를 다시 통합시킨다. 나환자를 만짐으로써 예수님은 율법을 어겼으나, 그분의 행위는 그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것, 무시받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한다. 다른 한편, 그분의 연민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멀리 그분을 데려갈지도 모른다. 예수님의 급진적이고 질문을 제기하는 메시지가 너무 이르게 알려지고 있다. 예수님은 나병이 치유된 그 사람에게 사제한테 가서 몸을 보이고(사회에 다시 통합되기 위한 조건이다)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말하지 말라고 당부한다.(1,43-44) 그러나 그 사람은 침묵할 수가 없었고, 그 일은 예수님의 사명 수행에 즉각적으로 어려움을 일으킨다. 그러나 하느님나라는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에게 열리고 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열기를 거부하고, 우리의 손을 그들에게, 특히 공민권을 빼앗긴 사람들에게 뻗지 않는다면, 교회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스캔들을 일으키게 된다. 오직 사랑과 관대함을 증언할 때 우리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뻗어 나갈 수 있다.(1코린 10,32) 우리는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그는 하는 일에서 자신의 이득을 구하지 않았다.(10,33)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모방하기 때문이다.(11,1)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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