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2월 25일 (사순 제2주일) 마르 9,1-9

엘리야(왼쪽부터), 예수, 모세와 아래에 제자 셋이 엎드려 있다. (이미지 출처 = maxpixel)

밤샘은 항상 극기가 포함되는 법이다. 사순시기는 절제와 급박한 상황 속에서 준비하고 기대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의 말씀은 이러한 구도와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이곳에 머뭅시다

마르코 복음의 오늘 말씀에 앞서 있는 장면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싶어 안달하면서도 실천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느린 모습이다. 예수님은 제자됨에 필요한 조건들을 지적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여긴 아이를 치유하는 예수님을 보았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마르 5,37-43)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으로 가는데, 그곳은 중대한 계시를 받는 전형적인 자리다. 그곳에서 주님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된다.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9,3) 그렇게 하얗게 만들 수 없는 예수님의 빛나는 옷은 이 변모라는 새로운 조건을 표현해 주고 있다. 율법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모세는 역사와 예수님의 백성들이 지니는 중요성을 대변한다. 주님 안에서 이 역사는 완전한 정점에 도달한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이야기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보여 준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했으나,(8,31) 베드로가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베드로는 놀라면서 “여기 있는 것이 좋겠다”(9,5)고 목청을 높이며 제안한다. 이어 마르코는 덧붙이기를 베드로가 너무나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9,6)고 한다. 또한 제자들이 “겁에 질렸다”(9,6)고도 표현한다. 베드로의 제안이 얼마나 황당했는가를 말해 주는 부분들이다. 그러나 역사는 중단될 수 없으며, 우리는 역사의 중요성을 파악해야 한다. 부활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희망을 갖고 역사를 보게 해 준다. 예수님의 죽음은 어둠의 승리가 아니다. 어둠은 이미 정복되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변모의 의미다.

아브라함의 믿음

부활이 우리에게 불을 지펴 준 희망은 하느님의 무조건의 사랑이 뚜렷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로마 8,31)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두려움은 베드로로 하여금 역사의 진행을 중단시키고 무슨 괄호처럼 피난처에 숨고 싶도록 만든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아무리 가혹해도 역사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사순시기의 핵심인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심오한 기쁨과 활력을 주는 희망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정의,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구원역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응답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사악의 희생처럼, 기만하지 않고 혹은 물러서지도 않으며 기꺼이 승복하는 것이다.(창세 22장)

아브라함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그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부활의 희망에 고무되어 주님께 승복할 때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증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세계 도처에서 발견하는 수많은 죽음들을 대면하면서도 생명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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