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3월 18일(사순 제5주일) 요한 12,20-33

“때”는 요한 복음서에서 반복하여 언급되는 성서적 용어다. 그것은 새로운 계약의 때를 말한다.(예레 31,31-34)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어떤 그리스인들”은 “축제에 예배하러 갔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다. 주님은 이 요청에 대하여 “때”에 관한 길고도 깊은 묵상으로 응답한다. 요한의 복음서는 모든 것이 마지막 결과를 향해 있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쓰였다. 그 마지막 결과란,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는 예수님의 힘과 그분을 거부하는 불의한 힘과의 대면이다. 이 교차는 십자가에서 일어나고 마침내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승리, 부활로 끝을 맺는다.

“때”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을 기반으로 하는 하느님의 무상의 사랑, 보편적인 사랑이 그분을 거부하는 사회와 종교의 역동력, 다시 말하자면 죄와 마주하는 순간이다. 그 갈등, 대립은 십자가에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상황을 고발하고 그분의 사랑의 복종을 증언하기 위하여 십자가는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12,32)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생명의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 필립보가 그리스인들에게 장차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던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이다.(12,21)

예수의 마지막 결과는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는 힘과 자신을 거부하는 불의한 힘과의 대면이다. 이 교차는 십자가에서 일어난다. (이미지 출처 = Unsplash)

자유로운 결정

십자가 위의 죽음은 어떤 운명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예수님은 한결같은 삶의 방식으로 그분의 “때”를 향하여 나아간다.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행위와 일치되고 그분의 행위는 그분의 말과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세상의 권력 앞에서 위험하게 된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선포한 새로운 계약을 확정한다. 이 약속은 백성이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이 백성에 속하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 목적은 하느님을 아는 것이고, 이 안다는 것은 성경에서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랑의 계약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다. 즉, 자유롭고도 전적인 승복의 사랑, 그 메시지가 우리에게 드러난 “때”, 땅에 떨어져 죽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 하나.(12,24)

이런 “때들”은 또한 사람들과 국가들의 삶에서도 일어난다. 때에 있어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제자로서 잘 살아가는가다. 이 “때들”은 우리 자신의 한결같음에 따라 형성된다. 우리가 일관성 있게 한결같이 살아가면, “때”는 올 것이다. 구체적인 교차점에서 우리는 열매를 맺는 낟알들이 되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생존하고자 하는 가난한 이들의 투쟁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충실함을 따라 행동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경우처럼 아무리 고통스럽다 해도,(히브 5,7-9)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질식시키는 상황 한가운데에서 모두를 위하여 생명을 증언해야 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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