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생각하는 이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데카르트를 이단이라 소리친 이들이 있다. 당시 개신교 신학자인 보에티우스다. 왜 그의 눈에 데카르트는 이단이었을까? 여기에서 우린 데카르트의 그 유명한 명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이 명제는 너무나 유명하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특별한 교육 없이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정말 상식적이다. 어찌 보면 이 사실 자체를 의심하긴 힘들다. 의심이란 생각도 결국 의심하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결국은 이 명제를 증명하는 또 다른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이 명제엔 다른 어떤 도움도 필요 없다. 오직 인간의 이성이면 그만이다. 더 정확하게 그 이성의 자발성과 그 자발성에 근거한 생각이 있으면 그만이다. 생각하는 이라면 누구나 이 진리를 향한 명제를 이해하고, 그 명제를 기반으로 절대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 하나를 손에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보에티우스는 이것이 싫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를 기반으로 거대한 합리적 철학의 건축물을 세우려 했다. 그 토대가 되는 이 명제가 너무나 단단하고 견고하여 많은 이들이 데카르트의 시도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보에티우스는 신의 도움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오직 인간만의 이러한 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신론이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또 다른 형태의 무신론 정도로 이해했다. 한마디로 이단이란 말이다. 보에티우스의 눈에 이성은 신앙의 조력자 혹은 도구일 뿐이다. 그것이 이성의 온전한 자리이며, 이성을 이렇게 노예로 부릴 수 있는 것은 신앙의 정당한 권리다. 이런 보에티우스의 눈에 신앙 없이 이성으로 진리를 이야기하려는 데카르트의 시도는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은 철학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보려 한다. 그러나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데카르트에게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요할 순 없다. 그는 신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철학을 하려는 것이다. 마르키 드 사드(1740-1814)와 같은 철학자를 보자. 그가 "규방철학"에서 보이는 성에 대한 담론은 도대체 신앙과 이성의 조화와 같은 것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여러 저작을 통하여 그가 그렇게 과도한 표현으로 시도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오직 철학만을 생각할 뿐이다. 철학자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성당을 다닌 사람이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가톨릭 계열의 학교에서 청소년을 보냈다. 그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우주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철학을 했다. 더 좋은 신앙을 위한 수단으로 철학을 고민하지 않았다. 철학이란 이렇다. 더 잘 이해하고, 더 합리적인 무엇인가를 구성하기 위한 이성의 자발성에 근거한다. 이런 철학은 무신론자의 철학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와 사드 그리고 들뢰즈와 같은 철학자들은 무신론자이고 철학자다. 스피노자의 신도 결국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는 이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신이라 볼 순 없다. 이들의 작품은 철학일 뿐이다. 철학, 즉 이성의 자발성으로 구성된 것일 뿐이다.

르네 데카르트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신학은 다르다. 신학은 철학과 달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의무감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 대학의 철학과인 인문학부에서 철학을 강의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학부에서 신학을 강의한 신학자다. 그의 주저는 "신학대전"이다. 그 책은 신학을 공부하려는 이들을 도우려는 선생의 마음이다. 이 책은 계시로 내려온 사실을 진리로 수용하는 신앙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냥 믿을 신앙이 있으면 믿는다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을 두고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과연 왜 진리이고 인간 존재에게 이 계시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생각한다. 즉 이성으로 이해하려 한다. 

신앙이 수용한 계시의 진리를 인간이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이 많다. 삼위일체도 그렇고 무에서 유의 창조도 그렇다.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각한다. 이해한다.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혼의 한 부분으로 그 진리를 수용한다는 것이다. 무력하게 이것은 진리이니 수용하라면 수용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용할 것은 두고 생각하고 생각하며 자신의 영혼 한 부분으로 만든다. 어찌 보면 수용한 것을 자기 삶으로 녹여 내는 과정이다. 이해한 것은 살아 있는 삶이 되기 좋다.

약자를 도우라 한다.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냥 수용한다. 약자를 돕는다. 별 다른 생각 없이 도우라니 돕는다. 돈을 거두기도 하고, 때론 국가의 복지 사업을 대행하여 운영하며 약자를 돕는다. 다른 생각이 없다. 약자를 도우라는 말의 의미, 내 삶에서의 적용, 그리고 진정 돕는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없이 그냥 돕는다. 로봇의 신앙이다. 그러나 인간은 로봇이 아니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다. 생각하고 생각한다. 생각하고 결단한 행위에 대하여 인간은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냥 눈에 보이는 약자를 도우라는 행위의 모습이 아니라, 그 본질을 따지고 고민하고 자기 삶에 어찌 적용할지 궁리한다. 신앙이 수동적으로 수용한 보편의 원리를 두고 이성은 어찌 그것을 우리의 삶으로 구체화시키고 그 본질을 흐리게 하지 않을지 고민하고 고민한다. 그리고 그 본질이 흐려질 때 큰 죄책감으로 힘들어하기도 한다.

철학에게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의무가 아니다. 그러나 신학과 신앙인에게 신앙과 이성의 조화는 의무다. 종교란 로봇의 행위가 아닌 이성적 존재의 행위이고, 자기 행위에 대한 충분한 합리적 근거 속에서 더 큰 동력을 얻는 존재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성적 존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신은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창조하였다. 고민하는 존재로 창조하였다. 어떻게 본질을 유지할지 고민하는 존재, 자신의 처지에서 쉼 없이 신이 계시한 삶을 어찌 발현할지 고민하고 고민하는 존재, 그런 존재로 만들었다. 신은 기계를 만들지 않았다. 그리고 기계의 작동 원리로 계시를 내린 것이 아니다. 

요즘 종교인의 타락을 보면 슬프다. 눈에 보이는 모습은 복지고 사랑이다. 그러나 이성은 신앙에게 묻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을 구현한 행위인지 고민해 보라고 말이다. 철학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의무로 가지지 않는다. 굳이 신앙을 고민하지 않는다. 단지 철학과 이성은 신앙에게 생각을 권할 뿐이다. 그리고 요즘 이성은 신앙에게 생각을 조금 더 간절히 권하고 있다. 생각하는 신앙이 지금 이 타락한 종교의 시대에 거의 하나뿐인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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