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힘든 삶이 불행의 이유는 아니다

나는 슬픈 일이라 생각한다. 간혹 누군가 자기 앞에 자기 삶이 나아갈 방향을 알려 주길 바란다. 적어도 나에게 이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 제시하여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무게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이 슬픔의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 자기 나아갈 바를 고민하고 궁리하며 살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매순간 다양한 선택지들이 앞에 놓이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 그 선택에 의해 자기 삶을 일구어야 한다. 당연 그 책임도 온전히 바로 자신이다. 그 책임도 무섭지만, 그 선택으로 자신의 미래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무섭다. 그 선택으로 미미한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론 자신의 삶 자체로 다르게 만들어 버릴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고민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오랜 시간 정해진 미래를 살았다. 어느 대학을 나오고 어느 신분에 도달하면 어떻게 살아갈지 정해진 듯이 보였다. 그리고 원래 세상의 곳이라 생각하고 그런 대로 수긍하며 살았다. 그 정해진 세상에서 내 자식의 삶이 자신의 비참한 삶과 달라지는 유일한 길은 교육뿐이라 믿었다. 그러니 참으로 독한 교육으로 많은 학생들을 자살이란 이름으로 죽였다. 그런 강요된 자살은 지금도 곳곳에서 이어진다. 자식의 대학은 어느 순간 부모의 명찰이 되고, 어른이란 이들은 서로 만나 자기 자식의 대학으로 서로의 행복과 불행을 확인하기도 한다. 정해진 세상, 사람이든 관습이든 이미 많은 것이 정해진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살아갈 앞날이 미래라고 하지만 과거를 회상하듯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그런 세상이다. 이 사회에서 자신이 무엇으로 시작하는지에 따라서 자신이 누가 될 것인지 정해져 버리는 무서운 세상, 그 세상에서 차라리 누군가 자신의 삶을 책임을 지고 이끌어 주면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따르고만 싶을지 모른다. 슬프게 말이다.

철학, 바로 철학이 필요한 순간이다. 사실 철학은 어떤 절대 진리를 찾기 위한 학문이 아니다. 고정된 답도 없다. 동시대 혹은 한 철학자의 삶에서도 다양한 답이 가능한 학문이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철학은 행복을 위해 있다. 그것도 인간다운 행복을 위해 있다. 좋은 것을 많이 먹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 고유의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다운 행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다운 행복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다. 너무나 익숙한 삶의 순간,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 것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와 고민에서 철학을 시작한다. 그 익숙함에 자신의 행복에 방해가 될 때, 그 방해물을 향하여 소리치며 철학은 시작한다. 그 소리침은 치열한 고민을 수반한다. 철학은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치열한 고민으로 얻은 자기 생각을 소리침이다. 

철학은 치열한 고민을 통한 행복을 이야기한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의사로 행복한 것은 무엇일까? 정치권력자로 행복한 것은 무엇일까? 이들 모두 인간인 한에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의사는 치열하게 고민하며 환자의 건강을 생각해야 하고, 정치권력자는 민중의 안정된 삶을 생각해야 한다. 의사는 돈을 벌기 위한 존재가 아니다. 정치권력자 역시 비자금을 마련하거나 자신의 벗들을 권력자로 만드는 인간이 아니다. 의사도 정치권력자도 그 이외 사제와 시장의 장사꾼과 학교의 학생과 선생도 저마다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누군가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열해야 한다. 그 치열함이 자기 자리에서의 행복을 그에게 허락하며, 인간으로 인간다운 행복도 허락한다.

중세 수도자들은 자신의 가난한 삶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했다. 단순히 돈을 벌지 않는 것을 넘어선 치열한 고민 속에 자신의 수도 생활과 가난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중세 많은 가톨릭교회의 타락에도 이러한 수도자들과 선하고 힘없는 사제들의 치열한 삶이 지금도 가톨릭교회를 이끄는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의사는 돈의 욕심에서 정치권력자는 권력의 욕심에서 수도자는 타락의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독립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고민했다. 그 고민이 그들의 육신을 힘들게 하였지만, 그들의 행복한 삶의 토대가 되었다.

철학은 치열한 고민을 통한 행복을 이야기한다. 비록 이 현실의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행복이라지만 그 이상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여정, 그 여정 자체를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철학의 행복이다. 그 여정은 쉽지 않았다.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

에리우게나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9세기 에리우게나는 자신의 이성으로 고민하는 신앙을 부탁했다. 자신의 이성으로 부단히 고민하는 신앙 말이다. 그의 이 말이 그를 이단아로 만들었다. 생각하는 신앙은 부당함에 대하여 소리치게 한다. 힘든 신앙과 힘든 삶을 주문하는 소리가 된다. 그 생각하는 신앙이 당시 교회권력자들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그와 유사한 주장을 한 13세기 많은 철학자들은 이단으로 몰렸다. 에리우게나는 살아서 2번 단죄를 받았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죽은 지 백 년도 더 지난 1225년에 다시 이단으로 단죄 받는다. 그에게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가장 인간다운 행복은 이성적 고민으로 이룬 행복이다. 그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가장 소중한 선물이며, 인간 가운데 가장 신성한 ‘신의 모상’이기 때문이다. 그 신의 모상으로 치열하게 고민하여 행복으로 다가가라는 그의 외침이 그의 시대엔 이단이었다. 그의 시대는 말 잘 듣는 신앙이 필요했나 보다.

철학의 행복은 쉽지 않다. 에리우게나의 행복과 같이 어렵다. 힘들다. 매순간 스스로의 양심과 스스로의 이성으로 매순간 자기 행위를 선택하고 고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 앞에 당당할 수 있다. 자신의 책이 불살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에리우게나와 오캄은 자기 고민을 포기하지 않았다. 철학자에게 힘든 삶은 불행의 이유가 아니다. 철학은 쉬운 삶을 권하지 않는다. 철학은 눈물을 흘리며 나아갈지 모를 힘든 행복을 권한다. 철학이란 그러한 것이다. 철학이란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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