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외로운 눈물이 없는 세상, 아픔 앞에 함께 우는 세상, 그 세상을 꿈꾼다.

결국 함께 행복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다 같이 조금 천천히 조금 덜 웃게 되어도 외롭게 웃는 세상이 아니라, 다 같이 더불어 웃는 그런 세상을 살자 말을 하고 싶었다. 길고 긴 이야기는 결국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더불어 행복하자. 조금 힘들어도 아니 많이 힘들어도 말이다.

행복은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 치열한 고민의 결실로 약간의 웃음이 주어진다. 그것이 행복이다. 행복은 절대 쉽지 않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많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착하게 살라는 이의 삶에서 너무나 쉽게 악을 본다. 입으로는 나누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지만, 갑의 지위에 있을 때 보이는 행동은 무섭기만 하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삶의 방식이 되어 있다. 일상이 되고 있고 상식이 되어 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곳이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편하다. 굳이 그런 상식과 다투며 힘들게 괴짜로 살기보다 원래 그렇다는 그 잔인한 상식에 수긍하며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 별다른 고민 없이 그냥 고통당할 때는 고통당하고 고통을 줄 때 고통 주면서 그렇게 살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삶이 사라지지 않는 악의 연쇄를 낳는 힘이다. 지금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고민해야 한다. 싸워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서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의 눈물을 거름 삼아 웃으며 살아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추운 겨울 차디찬 바람에도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서 독재자를 향하여 분노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온 자신의 삶, 그 삶의 공간에선 자신이 작은 독재자가 되어 남의 아픔을 자기 행복의 거름으로 삼는다면, 얼마나 모순적인 삶인가 말이다. 

행복은 홀로 행복할 때 온전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함께 행복해야 한다. 외롭게 홀로 웃는 웃음이 참다운 웃음이 아니듯이, 더불어 모두가 웃는 웃음이 참으로 아름다운 웃음이듯이 그렇게 행복도 더불어 다 같이 행복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지금 이 순간 당장 조금 덜 웃게 될 수도 있고 불편할 수도 있고, 남들의 눈에는 너무나 당연한 것을 두고, 깊고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 고민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비난하고 비판하던 그 세상, 서로가 서로의 아픔이고 서로가 서로의 슬픔이 되는 세상, 누군가의 패배를 보면서 웃는 승리자의 미소만이 참 행복이고, 누군가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빼앗아 누리는 부유함이 참 행복인 그러한 세상을 끝내기 위해 우린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포기해야 한다. 결국 이 연재의 긴 글로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행복은 불편하고 심지어 덜 웃게 될지 모른다. 때론 짜증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모습이다. 행복은 쉽지 않다. 포기하고 포기하는 삶, 궁리하고 고민하는 삶, 그 불편을 오히려 일상으로 수용하는 삶, 타자의 눈물을 남의 것이라 밀어내지 않고 함께 울고 분노해야 하는 삶, 어쩌면 행복은 바로 이러한 힘겨운 삶으로 얻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외로운 눈물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나에게 기적이란 이러한 것이다. 초자연적인 어떤 기적이 아니라, 자본이 행동의 이유가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타적 행복을 추구하는 삶, 나에게 그러한 삶이 바로 기적이며, 그러한 기적을 가능하게 응원하는 힘이 신앙이다. 즉 신앙이란 오직 나만의 기쁨을 위해 내 삶을 설계하고 남을 이기기 위한 무엇인가를 궁리할지 모를 이성에게 나만의 삶이 아닌 타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타자의 눈물의 옆에서 그와 함께할 미래를 설계하게 응원하고 지지하는 힘이라 생각한다. 신앙은 바로 그러한 것이라 생각한다. 타자의 눈물에 등 돌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행복이란 쉬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바로 이와 같이 끝없이 고민하고 궁리하는 삶의 여정에서 오는 것이다. 너무나 완고한 세상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변화하지 않을 것 같아도, 그 변화를 위하여 쉼 없이 고민하고 고민하는 그 힘겨움, 그 힘겨움을 응원한 신앙, 결국 이성과 신앙의 조화 속에 누리는 참다운 행복이란 바로 이러한 어려운 삶을 웃으려 살아가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내가 비판하던 이의 이기적 모습으로 살지 않기 위해, 나만의 기쁨을 위해 타자의 눈물을 당연히 여기지 않기 위해, 신앙은 매 순간 타자 앞에 선 나를 생각하도록 이성을 타일러야 한다. 함께 행복하자고 말이다. 조금 힘들어도 함께 행복하자고 말이다. 진정한 행복은 원래 조금 힘들다. 결국 지난 긴 이야기로 전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힘든 삶이 불행의 이유는 아니다. 지금 힘들어도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참다운 행복이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함께 더불어 행복하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다.

괴테가 쓴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는 “철학, 법학, 의학 거기에 유감스럽게 신학에 온 힘을 다해 연구하였지만 가련한 바보는 조금도 현명해지지 않았다” 한탄했다. 이성을 채우는 고상한 지식으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설사 나빠도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세상의 원리, 그 악의 연쇄를 따라 별 생각 없이 산다고 행복을 얻을 수 없다. 그 악마의 유혹을 따라 산다 해도 말이다. 결국 참 행복은 스스로 고민하고 결단해야 한다. 더불어 있음의 그 불편한 행복을 이겨 내며 말이다.

시작은 항상 마지막을 향한 첫걸음이다. 첫 연재를 시작할 때, 마지막을 생각했다. 비록 초라한 글솜씨에 대단하지 않은 지혜로 적어 간 글이지만 마지막엔 무엇인가 소중한 무엇을 남겨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미안하단 말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말 미안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정말 많이 미안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정말. 그것이 이 연재의 마지막 말이라 더욱더 미안하고 고마운 시간이었다. 미안하고 정말 고마운 시간이었다. 정말이다.

오늘로 유대칠의 '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연재를 마칩니다. 1년 4달 동안 중세 사회와 그 안에서 삶을 고민했던 오캄과 여러 철학자들을 소개해 주신 유대칠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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