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오캄의 정치존재론 읽기 10

‘신앙’이란 ‘이성’과 모순되는 것일까? 신앙의 삶은 무엇일까?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 의하면, 신앙은 이성 위에 있지만 신앙과 이성 사이 결코 실재적 모순이 있는 것은 아니다. 계시를 부어 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성 가운데 빛을 심으셨기 때문이다. 즉 신앙도 이성도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하느님에게 나온 것이다. 그러니 진리와 진리가 서로 다툴 수 없듯이 신앙과 이성은 서로 모순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오캄도 서로 방식은 다르지만 저마다의 논리 속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신앙과 이성을 조화하는 오캄의 방식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과 조금 다르다.

하느님은 학문의 대상인가? 롬바르도는 많은 중세 신학자에게 물었다. 이 물음을 두고 많은 신학자는 고민했다. 과연 신학은 학문인가? 신은 철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이성적 사유의 대상인가? 그리고 많은 신학자가 이 물음에 긍정했다. 신앙이란 신을 알아 가는 인식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캄은 거부했다. 신앙은 이성과 모순되고 충돌되며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되는 것은 아니라 했다. 사실 삼위일체라는 신앙의 문제를 1+1=2와 같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학문이란 1+1=2와 같은 보편적이고 필연적 공리를 구하려 한다. 그렇다면, 신학은 신에 대하여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동시에 절대 다르게 될 수 없는 논리적이고 합리적 공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인간의 이성은 과연 그럴 능력이 있는가? 오캄은 거부한다. 인간은 감각경험에서 오는 것만으로 이성으로 합리화하려 학문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오캄의 학문에 대한 기본 생각이다. 그런데 인간은 신에 대하여 그런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신에 대하여 인간은 1+1=2와 같은 그런 합리적 공리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고, 신앙과 이성이 서로 다툰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성이 신앙의 진리를 다른 학문과 같이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러한 지식을 구성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번뇌는 진리의 공간이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인간은 이성만으로 온전한 종교적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오캄은 이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지상의 삶에 대한 것은 이성의 몫이겠지만, 종교적 구원은 신앙으로 얻어진다 보았다. 그런데 신앙의 진리는 항상 필연적이고 보편적이진 않다. 즉, 신으로 나아가는 그 구원의 길은 정해진 것을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만인 휴대폰 매뉴얼의 내용과 같지 않다. 삶은 그렇게 쉽지 않다. 휴대폰 매뉴얼대로 휴대폰은 작동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휴대폰은 매뉴얼에 종속되어 있다. 자유가 없다. 고정되어 있다. 휴대폰에 대해 매뉴얼은 필연적인 지식이다. 당연하다. 휴대폰은 그 매뉴얼의 법칙에 따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매뉴얼에 담긴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면 휴대폰을 다룰 수 있다. 신에 대하여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인간에게 가능하다면, 휴대폰에게 매뉴얼이 있듯이 인간도 노력하면 신에 대한 매뉴얼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오캄은 거부한다. 있을 수 없다. 신은 어떤 필연적이고 보편적 법칙에도 종속되어 있지 않다. 굳이 인간이 신에 대하여 한마디 한다면, 신은 절대적인 자유라는 정도다. 절대 자유인 존재를 어떻게 필연적인 법칙 속에 구속하겠는가? 서로 모순이다.

인간은 신의 모상이다. 우리는 자유를 경험한다. 중국 음식점에 갈 때마다 괴롭다. 짬뽕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자장면을 먹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볶음밥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오늘은 평소 먹지 않던 울면을 먹을 것인가?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지금 나의 상황에서 더 큰 행복을 줄 것인가 고민한다. 정해진 매뉴얼은 없다. 규칙도 없다. 그 가운데 유일한 진리는 고민한다는 사실이다. 오캄에게 인간 본성의 가장 근원 사실은 고민한다는 것이다. 즉 자유에 놓여 있는 사실이다. 신 역시 자유롭다. 인간과 비교될 수 없는 절대 자유를 누린다. 인간의 자유는 ‘신의 모상’으로 인간에게 심긴 운명이다. 인간의 자유, 그 자유로운 결단은 때론 선일 수 있고 때론 악일 수 있다. 자장면을 먹으며 마음 한편 짬뽕을 그리워하듯이 인간은 항상 고민하고 후회하고 또 고민한다. 하지만 신은 다르다. 신의 자유는 그렇지 않다. 신이 원하는 것, 그것이 선이다. 그런 신과 다른 인간은 항상 고민한다. 매뉴얼은 없다. 항상 변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그 번뇌의 공간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가장 최적화된 진리를 구하고 그곳으로 다가간다. 바로 자신의 진리 말이다.

오캄은 관념적 추상인 보편적 진리보다 구체적인 이 공간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개인은 저마다의 삶에서 저마다의 진리를 고민하고 저마다의 의지로 결단하며 살아간다. 보편이란 추상적 관념은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고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일상 속 가득한 그 번뇌는 개인의 몫이다. 그 번뇌가 개인을 생각하게 하고, 어느 것이 더 바른 신앙의 길인지 고민하게 한다. 번뇌하게 한다. 그 번뇌로 개인은 개인의 진리를 가진다. 그 개인의 진리가 모여 임시로 만들어진 그 집단의 마음이 바로 보편 진리가 될 뿐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시대의 아픔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는 보편이 아닌 번뇌하는 개인이다. 추상적 관념인 보편 뒤에 숨어 있는 개인이 아니다. 번뇌하는 개인이다. 그리고 그 번뇌가 진리의 공간이다. 고민하고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다. 바르게 고민하는 신앙 말이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번뇌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번뇌가 진리의 공간이기에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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