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내 행복은 내 안에 있다. 내 손과 내 코가 내 몸에 있듯이 말이다.

희망이 무시당하는 세상이다. 열심히 노동하던 청년이 지하철 사고로 죽었던 일이 멀지 않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하다. 생수 공장에 실습을 나간 청년이 기계에 목이 끼여 죽었다. 여전히 가난한 이의 희망은 무시당하고 있다. 절망을 자발적으로 느끼는 이는 없다. 자발적 절망은 없다. 절망은 희망이 무시당하는 곳에서 강요되는 어쩔 수 없음이다. 그리 보면, 희망은 절망의 조건이다. 슬프게도 말이다.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신분제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수백 년 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쓴 "인간 처지의 비참함에 대하여"에서 읽게 되는 절망의 모습은 그리 오랜 과거의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다.

“노비란 사람은 부자의 시중을 들어야 하고, 그들이 주는 위협 앞에 겁을 먹어야 합니다. 부자의 시중드는 일이 힘들어 피곤해져도 그들의 가진 힘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착취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돈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 하여 돈을 조금이라도 가지게 되면, 바로 빼앗기게 됩니다. 주인의 실수는 노비에게 벌이 되고, 노비의 실수는 주인이 그를 괴롭힐 빌미가 될 뿐입니다.”

노비에게도 희망은 있다. 희망의 자격이 있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산다. 그러나 그 최선을 부자는 이용한다. 힘들게 마련한 작은 것도 어떤 식으로든 가져가 버린다. 죽으라 참으로 노력한 희망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바로 절망의 순간이다. 희망으로 일군 그 노력의 순간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것을 보면 절망하게 된다. 당연하다. 그 절망으로 부자들은 그들의 기쁨을 만들어 간다. 거대한 재벌 기업에게 부유함은 기쁨이고 희망이지만, 그들의 폭력 앞에 무력한 이들에게 고통이고 절망이다. "인간 처지의 비참함에 대하여"에서 인노첸시오 3세는 누군가에게 독점된 부유함과 기쁨이 결국은 타인에게 치유하기 힘든 절망의 이유가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당연하다. 슬픈 상식이다.

“인간은 특히나 세 가지를 가지려는 데 익숙합니다. 부유함과 기쁨 그리고 명예입니다. 사악한 것들은 부유함으로부터 옵니다. 수치스러운 것들은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그리고 공허한 것들은 명예로부터 오지요.”

권력자라는 이름의 공허한 명예를 위해 욕심이나 이기심이 만든 부유함 그리고 수치를 모르는 기쁨은 가진 자만을 위한 희망일 뿐이다. 없는 자에겐 절망일 뿐이다. 참된 희망은 다른 이의 절망을 전제로 생겨서는 안 된다. 희망 도둑질이 참된 희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참된 희망이라면 다른 이의 희망과 공존해야 한다. 그때 참된 희망이 가능하다. 서로 다른 희망이 서로 친구 하며 서로를 응원하는 그러한 공간에서 참된 희망이 가능하다. 그러나 부자와 권력자만이 자신들의 기쁨을 욕심내고, 그 기쁨을 위한 희망‘만’을 이야기한다면, 그 희망은 절대 참된 희망일 수 없다.

“염려는 영혼을 떨리게 합니다. 거대한 공포는 영혼을 제압해 버립니다. 고통은 영혼을 약하게 하고, 슬픔은 혼란스럽게 합니다. 소란은 마음은 우울하게 합니다. 가난함과 부유함, 노예와 주인, 기혼자와 독신자, 마지막으로 좋음과 나쁨, 이 모든 세상살이의(mundanis) 염려들이 엄습해 오고 있습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에 힘겨워 하고 있습니다.”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이 사회는 여전히 신분제 사회다. (사진 출처 = ko.wikipedia.org)

요즘은 입시철이다. 대학을 고기 등급처럼 나눈다. 낮은 등급의 대학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희망들을 아무렇지 않게 조롱하고 무시한다. 여전히 신분제 사회다. 어디 출신이면 백정이고 어디 출신이며 노비다. 각각의 대학에 따라 희망도 등급을 매긴다. 좋은 대학 출신에 좋은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집안이라면 최고 등급이다. 이런 등급이라면 ‘지잡대’라는 그저 이름만으로 슬픈 이들의 아픔을 조롱해도 그만이다. 가진 자의 기쁨은 당연하고 누군가의 힘겨운 행복은 잔인한 부자의 배려를 청해야 한다. 제발 희망을 가지게 해 달라 배려를 청해야 한다. 이 땅의 수많은 청춘들은 1등급이 아니다. 그들은 염려하고 있고, 공포와 슬픔에 제압되었으며 마음은 혼란스럽다. 당연한 가난이 두렵고, 돈 없어 결혼하지 못하는 미래가 두렵다.

희망, 지금 이 땅 수많은 청춘은 그 희망이 절망의 이유가 되었다. 차라리 희망이 없으면 좋겠다. 그러면 절망의 아픔도 덜할지 모른다. 노예제가 있던 시대 가장 인기 있던 책들은 비참한 인간에 대한 책이었다. 희망의 헛됨과 강요된 절망에 대한 무력감을 다루었다. 인노첸시오 3세의 책만이 아니다. 13세기 인물인 ‘후고 데 미로마리’(Hugo de Miromari)가 쓴 책의 제목도 "인간의 비참함과 세상과 지옥의 경멸에 대하여"다. 지금 우리는 처세술을 찾아 읽는다. 행복을 배우기 위해 행복 학교를 간다. 행복과 자존감을 위해 책을 읽는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를 읽는다. 행복과 자존감은 멀지 않다. 이것도 아니면 이런저런 감성의 위로를 받는다. 이상하게 12세기와 13세기의 독자도 지금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을 힘들게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희망은 무시되고 절망은 일상이 되어 있다. 그리고 21세기 처세술의 전문가들은 희망은 가까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내 코는 내 얼굴에 있고 내 손은 내 팔에 있다. 하지만 절망을 주는 이 사회는 내 밖에 있다. 어쩌면 이제 그 사회에 대한 힘든 분노가 필요한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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