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착한 교회, 착한 주교, 착한 사제 그리고 착한 평신도가 그립다.

옛날도 다르지 않다. 사제의 삶은 쉽지 않았다. 또한 쉽지 않은 길이기에 너무나 쉽게 타락할 수도 있는 길 또한 사제의 삶이다. 바로 그런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한 이들이 사제다. 많은 이들이 사제의 삶에 대하여 고민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도 사제와 주교의 삶에 대하여 고민했다. 591년 "사목교범"에서 주교직과 사제직이 무엇이며, 요구되는 덕성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규정했다. 쉽지 않은 길이라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길이기에 이런 교범으로 파락을 경계하기 위함일 것이다. 주교와 사제의 타락은 평신도에겐 너무나 큰 실망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교와 사제의 타락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항상 경계하려 하였다.

그레고리오 1세는 사제와 주교는 이 세상 기쁨에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의 기쁨에 욕심을 내면 남의 것이라도 더 가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긴다. 신을 향하고 이웃의 아픔을 향해야 할 마음이 남의 재산을 향한 욕심이 될 수 있다. 마땅히 가난한 이에게 돌아가야 할 것마저 자신의 욕심으로 횡령하고 죄책감보다 소유의 만족에 기뻐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의 기쁨이다. 주교와 사제는 바로 이러한 이 세상의 기쁨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과 무관한 남의 약함과 아픔도 남의 일이라며 고개 돌리지 않고 그들의 그 눈물에 함께하는 것이 주교이고 사제여야 한다. 그들과 나누고 부족한 것이 채워진 그 가난한 이들의 웃음이 정말 자신의 웃음이 되는 이가 주교이고 사제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욕심에 찬 행동을 교묘한 논리로 포장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 이는 좋은 주교도 사제도 아니다. 남의 악행을 두고도 마치 자신의 일인 듯이 아쉬워하고 아파해야 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더 엄격한 기준으로 도덕적 완성을 일구어야 하는 것이 주교이고 사제다. 

가난한 이의 아픔 앞에 고개 돌리고 심지어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을 챙기며 말로는 법을 알지 못해 그러했다 하고 돌아서 교묘한 말로 자신들의 악행을 포장하는 것이 주교이거나 사제가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기 죄를 직시하고 살아야하는 것이 주교이고 사제다. 매 순간 고민하고 결단하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어느 순간 과거가 된 지금이 부끄럽지 않게 말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이가 주교이고 사제다. 남의 앞에서 남의 머리 위에 군림하며 더 많은 것을 유지하고 소유하는 것이 주교이고 사제가 아니란 말이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당연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주교와 사제는 참으로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삶이 쉽지 않다. 참 어렵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그렇게 더욱더 결단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 주교이고 사제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사제와 주교의 삶에 대해 고민했다. (이미지 출처 = ko.wikipedia.org)

"성직 직무론"을 쓴 암브로시오 주교를 보자. 주교가 되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욕심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하여 강한 독설을 남겼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에 고개 돌리고 살지 말라 분노했다. 암브로시오 주교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필요 이상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며 살았다. 단지 말로만 착한 삶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 살았다. 말로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였다. 그에게 주교와 사제는 그러한 존재였다. 거대한 교회를 운영하는 경영인이 아니다. 착한 사람이다. 그 시대에 보기 드문 그런 착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주교이고 사제다. 성서를 들고 이런 저런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포장하고 행동으로는 탐욕을 가리는 그러한 이들이 주교와 사제가 아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이들, 그 착한 모습이 많은 이들에게 은은한 향기로 전해지는 이들이다. 그들이 주교이고 사제다.

이제 가난하기 힘들 만큼 교회는 거대해졌다. 자본주의 시대, 교회도 거대한 자본이 필요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 눈에 보이는 거대한 것이 필요했다. 과거와 같이 가난하기 힘든 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의 시대,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한 시대, 바로 이 시대, 교회가 적응해 버린 바로 이 시대, 그 시대의 무서움 앞에서 많은 이들은 전보다 더 힘들어 한다. 자살이 너무나 흔한 일이 되었다. 교회마저도 더 큰 승자가 되려는 시대다. 자신의 소유를 위하여 이런저런 부덕한 수단들도 사용되는 시대다. 주교와 사제도 더 큰 무언가를 욕심내는 듯이 보이는 그러한 시대다. 악덕 기업체나 저지를 이런저런 악행이 이젠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권유린과 노동 착취 그리고 공금 횡령 등등 말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돈과 관련되어 있다. 바로 이런 시대에 가난하고 힘든 사회적 약자는 교회를 향하여 당신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요? 질문한다. 이 세상의 기쁨보다 천상의 기쁨을 향하고 이웃의 눈물을 자신의 눈물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와 암브로시오 주교의 이야기가 그저 과거 누군가의 말일 뿐이며, 듣기 좋은 말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주교와 사제의 삶은 지금도 포기되지 말아야 한다. 모두 다 자본의 소유로 기뻐할 때, 적어도 교회는 그러지 말아야 한다. 설사 지금의 거대함을 포기한다 해도 말이다.

성탄이 다가온다. 자기 자신마저 내려놓은 착한 예수가 우리에게 찾아온 그날, 주교와 사제의 착한 삶을 생각해 본다. 물론 평신도의 착한 삶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일상 속에서 착한 예수의 모습으로 더 열심히 더 많은 곳에서 살아야 하는 이들은 평신도이니 말이다. 부디 착하자. 부디 착하자. 일상의 작은 예수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남에게 예수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말이다. 그 착함이 그리운 요즘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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