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오캄의 정치존재론 읽기 7

문제는 돈이다. 12-13세기 서유럽의 대부분은 더 이상 장원제 사회가 아니었다. 토지가 없어도 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열렸다. 대표적으로 ‘은행’이 등장하였다. 다른 육체적 노동 없이 이자 소득으로 매우 큰 이익을 만들 수 있음이 증명되었다. 제노바엔 최초의 대규모 은행이 세워진다. 이 은행은 불행히도 채권자들이 합의점을 찾지 못해 1259년 파산했지만, 변화한 사회를 보여 주었다. 채권자들은 귀족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제네바에 살던 외국인에서 평범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들이 은행의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타인의 돈으로 은행 사업을 하다 파산에 이르게 되면, 은행장은 심한 벌을 받았다. 감옥에 가야 했고, 아무리 귀족이라도 어떤 공직에 참여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 ‘굴욕의 돌’이란 돌로 매를 맞기도 했다. 은행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투자자들의 공공자산임을 생각해 보자. 결국 은행장의 무능과 실수는 자기 한 사람의 실패가 아닌 자신을 믿은 많은 이들의 실패와 파산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실수에 대해 무거운 벌을 내리는 것은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중세 대표적인 은행은 리카르디 은행이다. 이 은행은 1231년 3월에 작성된 한 문서에서도 발견될 만큼 오래전에 만들어진 은행이다. 그리고 그 뒤 60년이 지난 어느 날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폴랑드르, 스코틀랜드, 노르웨이에 이르는 유럽 전역에 은행 지점을 둔 거대 은행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과거에도 그렇듯이 많은 돈이 한곳에 모이면 그 시대의 권력자들이 서서히 개입하기 시작한다. 영국의 에드워드 1세와 프랑스의 필립 4세는 막대한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에 부당한 압력을 가했다. 거기에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역시 바티칸에서 공탁한 기금을 빨리 환급하라 요구하였다. 그러나 그 요구는 은행의 입장에선 거의 명령에 가까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왕들의 부당한 압력으로 인해 입은 거대한 손실만으로도 유지하기 힘든 은행에게 교황의 명령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은행은 25년 동안 유럽 최대의 은행으로 있었지만 두 권력의 부당한 개입으로 문을 닫는다. 그리고 그 부당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힘들어졌다.

▲ 후에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프랑스군에 납치당했다. (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

이런 일이 일어나는 동안 인구는 늘어났다. 생산된 식량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이어서 14세기에서 15세기까지 유럽 곳곳엔 전염병이 나돌게 되었고, 인구는 다시 줄었다. 많은 이들이 죽었고, 이에 따라 노동력이 줄게 되었다. 14세기 이후 줄어든 노동력은 노동임금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높아진 노동임금은 그들의 소득이 늘어남을 의미했다. 이러한 소득의 증대는 농민, 즉 중세시대 대표적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의 주체성을 더욱더 강화시켰다. 1381년 영국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의 난을 보자. 이 사건에 참여한 농민군은 교회 조직의 간소화, 교회 재산의 분배 등을 교회에 요구하였고, 농노제도의 폐지와 토지임대료 인하 등을 이루었다. 당시 와트 타일러와 함께 혁명에 참여한 존 볼은 아래와 같이 당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였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예속되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것은 신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다. 아담이 밭을 갈아 농사일을 하고 이브가 실을 만들던 바로 그때 과연 누가 귀족으로 있었단 말인가?”

13세기 국가권력과 교회권력의 개입으로 은행이 무너지는 것을 민중은 지켜보았다. 욕심 많은 국가권력과 교회권력의 개입으로 은행이 무너지고 그 피해자는 은행에 투자한 많은 이들임을 보았다. 그 은행에 지분을 가진 자신들이 부당한 개입으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13세기 이후 늘어난 소득으로 더욱더 자신감을 가지게 된 민중들은 이러한 개입에 대하여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하느님은 모두를 평등하게 창조하였음을 기억하라며, 이러한 창조의 진리가 무너진 시대에 대하여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1340년 덴마크, 1351년 마요르카,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 등 유럽 곳곳에서 농민들이 분노하기 시작하였다.

▲ 독일의 신비사상가 에크하르트 조각상(왼쪽).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에크하르트와 오캄 그리고 마르실리오와 같은 철학자들은 이러한 분노에 기름이 되는 철학을 내어 놓았다, 에크하르트는 분노하는 그 한 명 한 명도 이미 충분히 신성하다며 그들 존재의 신성함을 이야기했고, 오캄과 마르실리오는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과도한 월권에 대하여 지적하였다. 많은 중세 여성 사상가들이 등장하여 민중의 아픔과 함께하던 것도 바로 이러한 시기다. 그리고 당시 민중의 옆에 있던 이들 대부분의 사상가는 이단으로 단죄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중세엔 당연하지 않았다. 국가와 교회가 민중의 평등과 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은 상식이다. 민중의 삶을 파탄으로 몰고 가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 하는 것은 매우 큰 잘못이라는 것이 지금은 상식이다. 그러나 이런 상식이 만들어지던 시기다. 많은 민중의 분노, 생각이 담긴 분노로 만들어지던 시기다. 그런데 21세기 여전히 돈 욕심에 낮은 자의 인권을 무시하며, 자신의 노후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민중의 힘겨운 삶의 대가로 거대한 자본을 누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13세기 이후, 민중들은 그 타락에 침묵하지 않았다. 분노하였다. 결코 쉽지 않은 분노였다. 강자를 향한 약자들의 분노였다. 그러나 그 분노가 세상을 바꾸었다. 우리도 생각하자. 그리고 거짓 앞에서 분노하자. 그 분노가 다음 세대의 희망이 될 것이기에 말이다. 지금 우리 앞엔 분노할 것이 너무나 많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