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오캄의 정치존재론 읽기 9

서로 다른 여럿이 살아간다. 서로 다른 여럿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서로 살아가는 환경도 생각도 다른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그렇게 서로 다른 여럿이 하나의 공간 속에 하나의 우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이 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운 다툼을 만든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을 진보라 하고 누군가는 보수라고 한다. 진보라는 이들도 아주 많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보수 역시 다르지 않다. 아주 많은 결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큰 무리로 나누어 보지만 사실은 그 이상 아주 많은 서로 다른 생각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지구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숫자만큼 많은 생각이 공존하고 있을지 모른다. 

결국 동일한 생각에 동일한 감정에 동일한 행동으로 동일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고 어느 정도의 차이라도 서로 다른 여럿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서로 다름이 흔히 자연스럽게 다툼으로 이어진다. 학자들은 나의 사상은 답이고 너의 사상은 오답이라 외친다. 그런 다툼으로 자존감을 누리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나의 종교는 답이고 너의 종교는 오답이라 한다. 참 행복과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자신과 다른 길의 종교는 오답이며 심지어 아주 나쁜 세균과 같다 외친다. 그렇게 타인에겐 생명과 같은 종교의 가치는 악마와 같은 것이라 외쳐 버린다. 이렇게 서로들 다툰다.

한국 사회에도 서로 다른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그리고 항상 다툰다. 한때는 권력 가진 이들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항상 서로 다른 여러 생각들이 있으며, 그 서로 다름은 서로를 향하여 끝없이 다툰다. 그러나 제자리에서 다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서로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 없이 다투기만 한다면, 정말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여기고 전쟁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대화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의 답을 고민한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답이 정말 가장 정확한 답인지 다시 고민한다. 자신의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때론 남의 생각에 자극을 받아 또 다른 생각을 만들기도 한다. 대화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대화를 한다 해도 모두가 동일한 하나의 생각을 만들 순 없다. 인간의 운명이다.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생각이 공존하게 되어 있다.

오캄은 논리학자다. ‘논리학’이란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타인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사고의 도구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논리학이 가능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의 이성을 인정해야 한다. 나만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너는 이성이 없다면, 논리학은 필요 없다. 그냥 이성이 비이성을 향하여 명령을 하면 그만이다. 토론이란 대화를 위해 서로가 이성적임을 인정해야 한다. 토론이란 합리와 비합리의 마주함이 아니라, 합리와 합리의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천도교, 불교 등 5대 종단 종교인들이 9월 13일 청와대 분수대 앞 기자회견을 열고 "사드 배치"와 "종교 유린"을 비판했다. ⓒ강한 기자

수많은 이로 구성된 한 나라의 민중이 서로 다른 수많은 생각으로 구성되어 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서로의 이성을 인정해야 한다. 권력을 가진 이가 자신만 이성이고, 타자는 비이성적인 무지라고 판단한다면, 토론은 없다. 대화도 없다. 권력자는 민중에게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것이 답이라고 말이다. 이성이 비이성을 이성적으로 만든다는 그럴 듯한 명분으로 대화보다는 대화를 가장한 명령을 내릴 것이다. 이것이 독재다. 민중 역시 이성을 가진 존재다. 치열하게 자신의 정치적 조건들을 고민하고 답을 내리고 있다. 민중은 답이나 명령을 듣는 존재가 아니다. 민중도 이성을 가진 존재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 동물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는 권력자의 이성이 아니라, 민중의 이성들이 그 국가의 이성이 되는 그러한 사회다.

오캄은 유명론자다.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개별 인간일 뿐이다. 이 개인들이 사회를 이룬다. 그리고 이 개인의 뜻이 국가의 뜻이 되어야 한다. 개인은 무력한 존재가 아닌 논리적으로 대화 가능한 합리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드가 문제다. 많은 민중이 자신의 이성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며 반대하고 있다. 그냥 싫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치열한 고민으로 반대하고 있다. 서로 다른 이성들이 서로 토론하여 서로 다른 여러 논리적 반대를 이유를 내고 있지만, 반대라는 점에선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다. 이 합리적 동의에 국가권력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토론의 장에 나와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지금이라도 대화의 장에서 진지하게 서로의 이성을 향하여 논리적으로 논박하고 답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자기 결단한 다수의 국민에 의하여 정당성을 잃은 권력이 사라지고 조기 대선이 있었다. 생각하는 민중의 뜻이 이루어진 셈이다. 스스로 고민하고 토론하는 민중의 뜻이 역사를 만들어간 셈이다. 지금 다시 많은 국민은 사드의 정당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고, 권력에 합리적인 답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그것이 진정 국익이며 정당한 것인가를 말이다. 그리고 합리적 답이 정당하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민중의 이성에 따라서 말이다. 더 이상 생각하는 민중, 그 이성의 고민을 무시하지 말고 말이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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