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되는 앎, 중세 정치존재론 - 유대칠]

- 오캄의 정치존재론 읽기 8

누군가의 아픈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될 때가 있다. 가족도 아니고, 가까운 친구도 아니다. 가까이 사는 이웃도 아니다. 그러나 남의 눈물이 나의 눈물이 될 때가 있다. 그때 나와 남은 우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물론 하나가 되었다고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두 명의 나와 남이 하나의 존재로 녹아들어 서로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서로의 아픔이 그냥 남의 아픔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아픔으로 머물고 더불어 울고 웃고 분노하고 기뻐하게 되었다는 정도일지 모른다.

끝나지 않은 우리 역사의 아픔들도 많은 이들에겐 그저 남의 아픔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자행한 인권유린 및 강제인력수탈 만행의 대표적 피해 사례인 위안부 할머님의 눈물도 어찌 보면 남의 눈물이다. 형제복지원과 희망원의 아픔과 그 눈물도 남의 아픔이고 눈물이다. 세월호라고 다를 것이 없다. 남의 아픔이고 남의 눈물이다. 광주와 제주 그리고 여수에서 있었던 그 잔인한 살인의 광기, 그 광기의 희망도 남의 아픔이고 눈물이다. 지금 당장 나의 작은 아픔처럼 나의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는 그저 남의 아픔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누군가 사례를 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위안부 할머님의 아픔에 눈물을 흘린다. 심지어 일본인 가운데도 눈물을 흘리며 그분들의 아픈 눈물을 우리의 눈물이라며 안아드린다. 형제복지원과 희망원의 그 잔인한 아픔도 남의 것으로 둘 수 없는 우리의 눈물이라고 함께 소리 높인다. 광주, 제주 그리고 여수의 아픔들도 그냥 남의 것으로 둘 수 없다며, 함께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남의 아픔이니 그냥 남의 아픔으로 두어라.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하게 다가오는가? 함께 아파하는 것, 나의 아픔도 아닌 남의 아픔 앞에서 우리의 아픔이라며 함께 아파하는 것, 그 더불어 있음에서 홀로 있는 아픔은 희망을 찾는다.

성주의 아픔이 깊다. 우리 정부에 대한 믿음에 상처가 났다. 얼마나 아플까. 누군가는 그들의 아픔을 두고 지역 이기주의라고 한다. 누군가는 그 지역이 지지한 정당을 거론하며 비난하기도 한다. 결국 남의 일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남에게 일어난 남의 아픔이다. 나는 마치 스포츠 경기를 보듯이 보면서 평가한다. 그 깊은 아픔을 그저 남의 것으로 남겨 두고 자신을 떠난다. 이것이 성주의 아픔을 더욱더 깊게 할지 모른다.

▲ 성주의 일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사진 출처 = JTBC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오캄은 유명론자다. 유명론자에게 나의 세계에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것은 나란 ‘실체’뿐이다. 정말 나뿐이다. 그러나 그는 의회주의의 모습을 보인다. 사회에 나타난 악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악의 폭력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나가 누군가에게 남이다. 즉 사회 앞에 무너지는 행복이 그냥 남의 문제가 될 순 없다. 바로 우리의 문제다. 그렇기에 서로 다른 수많은 ‘나’들이 있지만, 그 악에 대하여 서로 논의하고 토론하여 대항해야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다. 남의 문제라며 고개 돌리고 나만을 생각할 때, 언젠가 그 폭력은 자신을 향할 수 있다. 그리고 수많은 남들은 그 문제에 고개 돌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더불어 논의하고 고민해야 한다. 남의 아픔은 그냥 남의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깊이 고민하면 쓸데없이 가정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사회적 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수많은 ‘나’들의 다양한 시선 속에서 토론되고 고민되면서 여러 가지 위장으로 자신을 가린 그 악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악의 실체 앞에서 나와 남의 악이 아닌 우리의 악임을 확인하게 된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임을 확인하고 그 해결책도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게 유명론자 오캄은 더불어 고민하는 의희주의의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성주의 일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주 군민들의 지역 이기주의가 이 사태의 핵심인가? 그들이 지난 선거에서 지지했던 정당의 색깔이 핵심인가? 아니면 이 땅의 민주주의와 독립국가로의 위상과 같은 것이 핵심인가? 단순히 한 지역의 문제인가 아니면 국가 차원의 심각한 정체성의 문제인가? ‘오캄의 면도날’이란 말이 있다. 쓸데없는 것은 모두 없애라는 말이다. 필요하지도 않은 다수의 가식과 치장 그리고 수사를 제거하면, 이 일의 실체가 남는다. 다시 생각해 보자. 이 일에서 오캄의 면도날이 온갖 수사를 제거하고 남겨진 것은 한 지역의 일인가 우리 모두의 일인가?

우리 민중은 위안부 할머님의 눈물과 세월호 그리고 많은 역사적 사건의 아픔 앞에서 결국 그 일이 남의 아픔이 아니라, 우리의 아픔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국회와 같은 대표기구에 우리의 일이라 해결을 호소했고, 온당치 않은 해법은 분노하기도 했다. 오캄의 면도날로 쓸데없는 것을 도려내고 남은 바로 고통과 아픔의 실체, 이번 성주의 눈물, 그 눈물의 실체를 고민해 보자. 그리하면 더 깊이 공감하고 그 공감에 근거한 연대로 이어질지 모른다.

세상은 참 힘들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차근히 오캄의 면도날을 들고 정리해 보자. 과연 이 눈물이 우리와 무관한 그저 남의 것이기만 한지 말이다. 어쩌면 구체적인 답이 무엇이든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다.

 
 
유대칠(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책을 적었다.
혼자만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한 공부보다 공유를 위한 공부를 위해 노력 중이다.
현재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작은 고전 세미나와 연구 그리고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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