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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의 아쉬움, 촛불로 이어지다부산교구, 6월 민주항쟁 기념

“사제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고문 없는 사회,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민주 국가를 위해 단식 중인 사제들을 돌봐 주시고 하루빨리 이 땅에 민주화가 이루어지도록 도와 주소서.”

1987년 5월 3일 부산교구 사제단이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단식기도를 시작했다. 교구는 사제단 단식기간 공소예절 참고용으로 이 같은 내용으로 보편지향 기도를 만들었다. 울산, 김해, 밀양, 언양, 울주 등 본당 신자가 이 기도를 읊었다. “성당에서 초등학생,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이 기도를 드리는 걸 상상해 보세요.”

당시 부산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천사협)의 사무국장이었던 류승렬 씨(빈첸시오)는 이 기도를 소개하며, 당시 삼엄한 분위기에서 사제단의 단식이 민주화운동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했다. “수녀님이 교구청에 왔다가 사제단이나 서울 정평위, 부민협(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성명서 자료를 가져가곤 했는데, 어떤 수녀님은 수도복에 눈치 보며 숨겨서 가져갔다.”

송기인 신부는 “신부도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던” 시절이라고 그때를 돌아봤다. 그는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더 고약했다. 전두환이 등장하자 정의구현사제단은 전국적으로 조용히 숨었다. 움직이면 절단 나니까....”라고 말했다. 송 신부는 부민협 상임위원장,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등을 맡았고, 문재인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로 통한다.

   
▲ 6월 12일 저녁 부산교구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으로 토크 콘서트를 마련했다. 청년 우동준 씨가 질문하고 송기인 신부, 당시 천사협 사무국장 류승렬 씨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배선영 기자

6월 12일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며 ‘청년이 묻고, 역사가 답하다’ 토크 콘서트를 마련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1987년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우동준 씨(27, 마르첼리노)가 질문하고, 송기인 신부와 류승렬 씨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우동준 씨는 이번 행사를 위해 6월 항쟁을 공부하고 질문의 초안을 만들었다. 그는 천사네(천주교 사회교리실천 네크워크)와 사교뭉치(사회교리를 알리고자 뭉친 청년모임)의 실행위원이다. 우 씨는 이번에 행사를 준비하면서, “우리 세대와 단절된, 먼 일인 줄 알았던 6월 항쟁이 내 삶과 연결돼 있다고 느꼈다”고 했다. 특히 부산 천사협의 첫 의장이었고, 부민협의 집행위원장이었던 당시 문재인 변호사가 지금은 자신이 뽑은 대통령임을 보며 더 그렇다.

천사협은 1986년 9월부터 이미 활동해 오다, 1987년 4월 29일 문재인 변호사를 의장으로 추대하면서 공식 출범했다. 류승렬 씨는 당시 대학생연합회, 각 성당 청년회, 노동청년회 등 개인과 조직의 기반으로 평신도 단체인 천사협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성명서, 홍보물 등을 인쇄해 본당 등에 배포하고, 미사나 기도회, 행진 때 청소부터 질서유지까지 도맡았다. 특히 가톨릭의 언어와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사회단체와 연대할 때 교회와 이들 사이의 소통을 도왔다.

   
▲ 송기인 신부 ⓒ배선영 기자

1987년 박종철의 죽음과 4.13호헌조치(개헌 논의를 금지하고 당시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겠다는 선언)로 시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전국 교구에서 사제들의 단식 기도회가 이어졌다.

부산교구 사제 25명이 가톨릭센터에서 단식에 들어갔을 때 천사협은 발로 뛰며 본당 등에 이 소식을 알렸다. 류 씨는 “지금 생각하면 (사제들의 단식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고 회상했다. 이어 “결정은 느리지만, 한번 결정하면 교구 차원의 통일된 행동을 하고 물적, 인적으로 잘 지원하는 특성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봉헌된 5.18광주항쟁 7주기 미사에서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경찰이 박종철의 죽음을 축소, 은폐했다고 폭로했다. 이 일이 6.10민주항쟁의 결정적 계기다. 류승렬 씨는 당시 이 일은 <JTBC>의 최순실 태블릿PC 보도와 같은 영향을 끼쳤으며, (전두환 정권이) 고문의 폭력성뿐 아니라 거짓말하는 부도덕성을 내보인 게 됐다고 했다.

당시 이부영 씨가 박종철의 죽음에 대해 교도소에서 휴지에 쓴 메모가 교도관을 통해 사제단에 전달됐는데, 송기인 신부는 “김 신부의 발표는 기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과정이 6.29(당시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 직선제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어 부산 정평위는 가톨릭센터에서 5.18광주 민주항쟁 사진전과 비디오 상영회를 연다. 류 씨는 사진전을 발로 뛰며 준비했다. 그는 “버스에서 초청장을 나눠 주고 후딱 내리면서 알렸다”고 했다. 6만여 명이 가톨릭센터에서 열린 전시회를 찾았다. 첫날 6월 8일부터 줄이 200미터나 이어졌다.

6월 10일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있고 시위가 이어졌다. 그는 “그때 정말 대단했다. 서면부터 남포동까지 계속 싸웠다. 18-19일 가장 많이 모였고, (시민이) 부산을 장악했다”고 기억했다. 일부에서는 이때 부산에서의 대규모 시위를 보고 집권세력이 6.29조치 양보를 결정했다고 보기도 한다.

6월 22일 가톨릭센터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이 안전귀가를 보장받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경찰이 보복으로 최루탄을 난사해 17명이 부상당했다. 그중 2명이 신부였고, 1명은 운전기사였다. 24일 교구 사제단 80여 명은 성명을 내고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26일에도 가톨릭센터 앞에서 2000여 명이 시위를 벌였고, 28일에는 중앙 성당에서 폭력 종식과 인권회복을 위한 미사 뒤 5000여 명이 평화대행진을 했다.

   
▲ 1987년 당시 천주교사회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이었던 류승렬 씨. ⓒ배선영 기자

송 신부는 6월 항쟁 당시 미국에 있었다. 당시 부산교구 이갑수 주교는 안기부(지금의 국정원)의 압력 때문에 송 신부를 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도 활발했다. 미국의 시민단체와 연대하고, 신문에 투고하고, <라디오 코리아>라는 프로에 거의 매주 나갔다고 했다. 364일 만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민주화운동을 이어 갔다.

그는 1974년 유신정권 아래 부산 최초의 민주화운동단체인 ‘인권선교협의회’를 시작으로 부산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된 부민협을 만든 과정을 이야기했다. 부민협이 확대돼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가 만들어졌다. 당시 부민협 공동집행위원장이던 노무현 변호사와 문재인 변호사도 여기에 참여했다. 부산본부는 서울보다 일주일 먼저 만들어졌지만 전국 조직이 형성되면서 부산본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행사 시작 전 만난 류승렬 씨에게 지난해 촛불집회를 보면서 어땠는지 물었다. 그는 그때(그렇게 열심히 싸워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니) 미완이었고, 아쉬웠는데 사람들 마음과 잠재의식에 그 불씨가 남아 촛불에서 완성되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이렇게 공식 행사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그는 당시에는 일만 하고 기억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진도, 자료도 남기지 않았다. “머릿속에 있으면 내가 잡혔을 때 맞다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이름이 나올지 몰라 일부러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다. 기억을 잘 할수록 피해를 주니까.” 그는 암묵적으로 이런 분위기였다고 했다.

   
▲ 1987년 부산교구 정평위가 연 광주민주항쟁 추모 사진전 초청장. (사진 제공 = 류승렬 씨)
그는 6월 항쟁의 가치가 이어지려면 민주주의가 상식이 되고 당연하게 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소수자를 배려하고,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리가 침해당하면 불쾌감과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면 그게 강한 민주주의가 아닐까.”

그는 1987년 이전에는 공권력의 폭력에 나라가 저러는 건 이유가 있겠지, 질서가 중요하지, 힘없는 우리는 당해야지 등의 포기가 많았는데, 지금은 ‘이게 나라냐’라고 한다며 이런 문화가 더 녹아 들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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