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하는 가톨릭교회’ 주제로 ‘지금여기 특강’ 열려
이연학 신부 "수행과 사회적 실천"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거룩한 삶이란 온통 환상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성소나 내 수도승생활 자체를 의심한다는 말은 아니다. 수도원에 살면서 너무도 쉽게 지니게 되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산다’는 관념이 그 자체로 완전히 환상일 따름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행하는 가톨릭교회’라는 주제로 지난 6월 23일 예수회센터에서 열린 ‘지금여기 특강’에서 이연학 신부(올리베따노 베네딕도회)는 토마스 머튼과 알제리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형제들, 그리고 크리스티앙 원장수사를 ‘수행하는 사회적 실천’ 또는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수행’의 증인으로 택하여 소개했다.
토마스 머튼은 “(수도자들이)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준(準) 천사’, ‘영적 인간 ’, '내적 생활의 인간' 등으로 표현되는 데서 보듯, 마치 다른 류(類)의 존재가 된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는 “수도생활이 ‘매일의 일상생활’이라는 구체적 세상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속을 멸시할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며, 수도자들 역시 별세계가 아니라 “폭탄과 인종차별의 세상, 기술문명과 매스 미디어의 세상, 거대 기업과 혁명의 세상에 살고 있다”고 전한다. 머튼은 다만 “수도승은 하느님께 속해 있기에 이 모든 것들에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할 뿐”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고독한 섬이 아니다”

이연학 신부는 “토마스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하고 17년 후에야 이렇게 세상 사람들과 근원에서 연결된 존재로 다시 알아듣고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영성가’ 머튼이 ‘시민활동가’로 전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도승으로서 걸어오던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결정적인 ‘회개’(metanoia, 생각의 전환)’의 진일보를 이루었음을 증언하는 장면이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의 본래면목으로 깨어나면서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발견하고 자매와 형제들을 발견하고 그리스도를 발견한다”고 말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고독한 ‘섬’이라기보다 바다 밑에서도 섬들을 이어주고 있는 땅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머튼에게 이러한 발견은 커다란 기쁨과 감사였다. 여기서 그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따듯한 눈을 얻는다. 그 다음에 머튼이 깨달은 것은 “그가 세상에 횡행하는 악과 폭력 앞에서 더 이상 ‘죄 없는 방관자’가 아니라 ‘죄 많은 방관자(guilty bystander)’일 따름”이라는 자각이다.
자신을 ‘죄스러운 방관자’로 자각하면서 수도승들은 기도와 고독 가운데서도 ‘예언적 사명’을 깨닫는다. 머튼은 이승을 떠나기 몇 시간 전에 “수도승은 본질적으로 현실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 결과 머튼은 “필요하다면 불편한 사람, 기피대상(persona ingrata)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전했다.
관상, 세상혐오와 정교분리의 환상을 깨는 힘
이연학 신부에 따르면, 토마스 머튼은 한나 아렌트가 쓴 <인간의 조건>을 읽고 결정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예언적) ‘회개’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오늘날 사회에서 시민사회(polis)의 공적 영역에 관한 관심과 헌신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활동(행동, praxis)’보다 ‘관상(사색, theoria)’ 쪽에 압도적 중요성을 부여해준 탓이 크다”고 지적했다. 머튼은 아렌트의 통찰을 통해, 관상(사색의 능력)에 뿌리를 둔 활동(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머튼은 관상이 ‘세상혐오’라는 영적 오해를 풀고, 당연시되는 ‘정교분리론’의 환상을 깨뜨리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침묵하지 않을 용기’다. 머튼은 관상을 통해 ‘오염된 말’을 정화시킬 의무를 느낀다. ‘오염된 말’은 ‘사유의 힘’을 상실한 말이라고 전한다.
“이것은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듯 이면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관상의 눈’의 상실과 이어질 뿐 아니라, 아이히만식의 ‘생각없음(thoughtlessness)’ 혹은 타자의 입장과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공감무능력)로도 곧바로 이어진다.”

‘어떤 신문을 보느냐’가 중요한 이유
머튼은 광고카피처럼 지극히 효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빚어지고 ‘세뇌’되는 언어의 남용-오용-악용 현상을 목격했다. ‘정교분리’ 역시 “어쩌면 교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 시대의 막강한 상투어중 하나”이며, 결국 “불의와 폭력으로 지탱되고 있는 기득권층의 질서를 편들고 고착시키는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이연학 신부는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과, “정치중립을 지켜야한다”는 말은 한국의 지배권력이 최근에도 남발해온 ‘3자개입 자제(금지)’란 말처럼, 사실상 매우 ‘정치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세계사를 보나 국내의 역사를 보나, 그것은 종교를 정치세력의 하위파트너로 기능시키려는 또 다른 형태의 ‘정교결합’(더 정확히는 ‘野合’ 혹은 ‘和姦’)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하느님을 우리 삶에 어떤 간섭도 못하시게 만든다는 점에서 ‘악마적’이기까지 하고(마르 1,24 참조), 무신론보다 더 위험한 ‘실천적 무신론’이다.”
이연학 신부는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때 지배자의 자리에 총칼을 쥔 권력이 있었다면, 이제는 ‘돈’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면서 무력이든 돈이든, 그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가장 큰 도구가 바로 ‘말’이라고 꼬집었다.
이 신부는 조지 오웰이 소설 <1984년>에서 잘 묘사한 것처럼, 대중의 말만 지배하면 그 생각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므로 “어떤 신문을 보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말했다. 신문은 우리가 매일 먹는 밥처럼 세상을 보는 우리 눈을 모르는 사이에 조정-조종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모르는 사이에 성경을 읽는 우리의 눈도 조종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차원에서, 이 신부는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쇄신은 무엇보다 먼저 말의 쇄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디아스포라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뵙다
한편 이 신부는 알제리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크리스티앙 원장수사의 영성을 소개하면서, 크리스티앙 신부가 이슬람 세계 한가운데서 무슬림들을 타자로 보지 않고 형제요 이웃으로 삼아 자신을 헌신한 것은 “스스로가 차별받는 가난한 약자요 경계인의 자리, 디아스포라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가난하고 낮은 곳에서만, 가난하고 낮은 곳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뵙는 눈이 열린다”고 전했다.
여기서도 이 신부는 ‘정교분리’라는 오래된 상투어에 대한 비판을 덧붙인다. 그들 알제리의 수도자들이 죽임을 당하기 전에, ‘무장이슬람집단’이 이들에게 보낸 <통지문>이야말로 ‘정교분리’의 환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무릇 수도승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수방(修房)에 은거하여 잠심하는 사람이다. 나지르인들 사이에서 이들은 은수자라고 불린다. 아부 바크르 알 시딕은(제 2대 칼리프) 이런 이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런 수도승이 자기 은수처를 떠나 사람들과 섞이게 되면 그를 죽이는 일은 적법하다. 우리가 포로로 잡고 있는 이 수도승들이 그런 경우로서,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며 복음화를 꾀했다. 그들에 대해 고발한 내용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이를 두고 이 신부는 “수도자들은 ‘세상 밖으로’ 나와 정치 같은 영역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말라는 힘을 쥔 자들의 생각”을 경계하며, 알제리의 수도자들이 “더 세상 안으로, 덜 세속적으로(plus in hoc mundo, minus de hoc mundo)”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스승처럼 세상 안에서 ‘구경거리(theoria)’(루카 23,48)가 되었다고 말했다.
덧붙여 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정녕 참된 관상가였으니, 세상의 힘있는 말들이 가르쳐준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 타자를 볼 수 있었다. 타자 안에서 하느님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환대함으로써 하느님을 환대할 수 있었다. 타자 안에서 하느님을 뵐 때만 타자들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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