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특강 이연학 신부 발제 전문]

증언 1. 토마스 머튼

1) 세상과 영성

널리 알려졌듯, 토마스 머튼(1915-1968)의 생애와 영성에서 결정적인 것은 이른바 ‘포스와 월넛가(Fourth and Walnut street) 체험’이다.

▲토마스 머튼
“루이빌 쇼핑가, 4가와 월넛 가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불현듯 이런 자각이 나를 압도해 왔다(overwhelmed).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그들은 내 사람들이고 나 역시 그들의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완전히 낯선 타인(strangers)일지라도 결코 서로 아무 관계없는 존재(alien)일 수 없다는 것. 이 자각은 마치 어떤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도 비슷했다. 수도승들이 어떤 별세계, 포기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진 별세계에 살며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미망, 거짓된 자기 소외라는 미망에서 깨어나는 일과 비슷했던 것이다.

“루이빌 쇼핑가, 4가와 월넛 가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불현듯 이런 자각이 나를 압도해 왔다(overwhelmed).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그들은 내 사람들이고 나 역시 그들의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서로에게 완전히 낯선 타인(strangers)일지라도 결코 서로 아무 관계없는 존재(alien)일 수 없다는 것. 이 자각은 마치 어떤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도 비슷했다. 수도승들이 어떤 별세계, 포기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진 별세계에 살며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미망, 거짓된 자기 소외라는 미망에서 깨어나는 일과 비슷했던 것이다.

세상과 분리되어 사는 거룩한 삶이란 온통 환상일 따름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성소나 내 수도승생활 자체를 의심한다는 말은 아니다. 수도원에 살면서 너무도 쉽게 지니게 되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산다”는 관념이 그 자체로 완전히 환상일 따름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수도서원을 함으로써, ‘거의 천사(pseudo-angels)’, ‘영적 인간’, 내적 생활의 인간 등으로 표현되는 데서 보듯, 우리가 마치 다른 류(類)의 존재가 된다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수도승생활의 전통적 가치는 대단히 실제적인(real) 것임이 분명하지만, 수도승생활의 그 실재(reality)가 매일의 일상생활이라는 구체적 세상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속을 멸시할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도 아니다. 설혹 “세상 바깥에”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사는 똑같은 세상 안에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폭탄과 인종차별의 세상, 기술문명과 매스 미디어의 세상, 거대 기업과 혁명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수도승은 하느님께 속해 있기에 이 모든 것들에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이가 다 하느님께 속해 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 이를 자각하게 되고, 이러한 자각에서 서원을 하게 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수도승들이 다른 이들과 다르거나, 심지어 더 나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이것은 온통 본말이 전도된 생각일 따름이다.

“우리는 다르다”는 환상에서 해방되었다는 느낌이 내게 너무도 큰 안심과 기쁨을 준 나머지 나는 거의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이런 행복감을 이렇게 (달리) 표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같아서, 제가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일 따름이어서,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수도생활 입문 후) 십륙칠년 동안 나는 수도승들 의식의 저변에 그토록 만연한, 순전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그런 생각을 지니고 살아왔던 것이다.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영광스런 운명이다. 이 인류가 설혹 어리석고 끔찍한 짓을 수도 없이 저지른다고 하더라도 그러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몸소 인류의 한 구성원이 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 이토록 평범한 깨달음이 갑자기 마치 누가 엄청난 행운을 거저 거머쥐게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처럼 다가온 것이다.

내가 사람이라는 것, 하느님께서 몸소 그 가운데 강생하신 인류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인간 현실의 슬픔과 어리석음이 나를 압도할 수 있었듯이, 이제 나는 이렇게 우리의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이런 것은 말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마치 태양처럼 빛나며 걸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내 고독의 가치나 의미에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고독이야말로 이런 것들을 선명히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경써야 할 다른 일들과 환상들, 숨가쁜 집단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모든 일들에 완전히 잠겨있을 때는 이런 것을 선명히 깨달을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고독은 내 것이 아니다. 이제 나는 내 고독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속한 것인지를 깨닫고 있다. 나는 단지 나 자신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그들과 관련해서 이 고독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홀로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덕이니, 이것은 내가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홀로 있을 때, 그들은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타인(strangers)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그들 마음 속의 비밀스런 아름다움을, 그 깊이를 본 듯했다. 죄도 욕망도, 그 어떤 자기인식도 도달할 수 없는 그들의 본래면목, 그 심장부를 본 듯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 그들 각자를 보는 듯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이 모습을 그들 모두가 스스로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늘 서로를 이런 식으로 볼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전쟁도 증오도 잔인함도 탐욕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나는 우리가 서로 앞에 엎드려 절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눈으로 보아 알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특별한 은사로 말미암아 믿고 ‘이해될’ 수 있을 따름이다.” (<Conjectures by a guilty bystander>, 1966)

이 이야기에서 우리 주제와 관련해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점들을 대략 다음과 같이 추려보고싶다. 먼저, 오늘날 흔히 ‘연대’라고 일컫는 주제가 등장한다. 머튼은 수도원에 입회하고 17년 후에야 이렇게 세상 사람들과 근원에서 연결된 존재로 다시 알아듣고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머튼이 사회적 의식으로 각성되어서 생긴 일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의 영적 체험의 소산임을 본문의 묘사를 통해 잘 느낄 수 있다.

연대

다시 말해 이것은 ‘영성가’ 머튼이 ‘시민활동가’로 전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수도승으로서 걸어오던 여정의 연장선상에서 결정적인 ‘회개’(metanoia, 생각의 전환)’의 진일보를 이루었음을 증언하는 장면이다. “불현듯 그들 마음 속의 비밀스런 아름다움을, 그 깊이를 본 듯했다. 죄도 욕망도, 그 어떤 자기인식도 도달할 수 없는 그들의 본래면목, 그 심장부를 본 듯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 그들 각자를 보는 듯했다.”는 위 본문의 표현에 담긴 체험에서 우리는 이를 잘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체험은 실상 ‘세상 발견’ 혹은 ‘타자 발견’으로 이어지며, 그들과의 심원한 연대의 깨달음도 그 연장선상에 있음을 주목하게 된다.

그는 “우리의 본래면목으로 깨어나면서 우리는 단지 우리 자신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발견하고 자매와 형제들을 발견하며 그리스도를 발견한다”고 다른 데서 말한 바 있다.(<Contemplation in a world of action>).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고독한 개별자로서의 ‘섬’이라기보다 바다밑에서도 섬들을 이어주고 있는 땅과도 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이런 체험의 지점을 머튼은 여러가지 용어로 부르고 있다. 예컨대 ‘point vièrge’, ‘정점(頂點), 혹은 고요한 지점(still point)’, “우리 존재의 무(無)의 중심(the center of our nothingness where one meets God)” 등과 같은 표현이다.

이는 사실 신앙의 근본적인 사회성에 대한 성경과 옛 교부들의 관점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바로 이 깨달음에서부터 이제 머튼은 비로소 안심하고 자기가 사람 중 하나임을 맘껏 기뻐하고 감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기쁨과 감사로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따듯한 눈을 얻게 된다. 그가 세상에 횡행하는 악과 폭력 앞에서 더 이상 ‘죄없는 방관자’가 아니라 ‘죄많은 방관자(guilty bystander)’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성속분리의 환상

나아가 그가 ‘세상혐오(contemptus mundi)’라는, 수도승전통 뿐아니라 교회의 영성전통에서도 끈질기게 전해내려온 치명적인 영적 오해를 벗고, 비로소 ‘세상사랑(amor mundi)’이라는 더 성숙하고 복음적인 여정으로 접어들 수 있게 된 것 또한 바로 이 지점이다. 예나 오늘이나 교회 안팎을 막론하고 세상에 흔하고도 뿌리깊은 것이 성속이원론이거니와, 여기 토대를 둔 ‘정교분리론’ 역시 예나 오늘이나 그 힘이 세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실로 ‘믿을 교리’보다 더 힘세고, 어지간한 신앙보다 더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대중에게 행사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상투어(cliché)’ 가운데 하나다. 머튼이 천착한 이 ‘말’의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다루기로 한다.

“꿈에서 깨어난” 머튼은 이제 이런 것들을 한 마디로 ‘환상’이라 부르면서, 이 ‘새로운’(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깨달음의 신학적 근거도 밝히고 있다. 그것이 바로 강생의 신비이다. 그러나 강생만이 아니라 사실은 파스카 사건과 삼위일체 신비 역시 이런 관점의 토대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타자를 향해, 타자와 함께 계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타자를-위한-존재”인(D. 본회퍼) 예수그리스도의 강생을 통해 환히 드러났고, 십자가를 정점으로 하는 파스카는 강생에서 이미 시작된 그분 비움(kenosis)의 궁극적 도달점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행의 사회적 책임

머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쩌면 본인에게 가장 중요했을 수도승 수행인 ‘고독’의 가치와 ‘책임’을 새로이 발견하기에 이른다. 이는 ‘죄스러운 방관자’로서의 자각의 자연적인 귀결로서, 고독의 자리에서 ‘분리’라는 환상으로부터 깨어난 이는 다른 사람들 역시 이런 환상에서 깨어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도와 고독은 ‘예언적 사명’의 책임을 지니게 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그는 “필요하다면 불편한 사람, 기피대상(persona ingrata)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수도승은 본질적으로 현실세계와 그 구성체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을 뜻한다”는 말도 남겼다. “그는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 관상적 삶의 본질에 속한다는 사실을 이해했으니, 여러 해 동안의 기도와 고독은 그로 하여금 자기자신의 환상과 대면하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과 동료 인간들에게 차라리 숨기고 싶은 현실들을 드러낼 준비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가면 벗기기’는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게임 같은 것이 아니라 ‘두려운 의무’였다.”(헨리 나웬)

2) 사회적 실천(praxis)과 말의 문제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vita activa>

머튼의 이러한 ‘회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가 1960년에 그가 읽고 있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부제가 ‘활동생활(vita active)’임에 유의)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일기에서 잘 드러난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오늘날 사회에서 시민사회(polis)의 공적 영역에 관한 관심과 헌신이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교가 ‘활동(행동, praxis)’보다 ‘관상(사색, theoria)’ 쪽에 압도적 중요성을 부여해준 탓이 크다는 점을 지적했다.

아렌트는 이 책 전체를 통해 ‘행동(사회적-정치적 실천praxis, vita activa)’이 ‘관상’에 못지 않게 얼마나 중요하고 고귀한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만, 근대 이후 ‘행동’이 착취당하는 ‘노동’으로만 소외되어버리고 만 현상, 그리하여 참으로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에 불과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결국에는 그 치료법으로 다시 관상적 요소의 회복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머튼은 ‘관상생활(vita contemplativa)’을 소명으로 삼는 자신에게 큰 도전이 된 아렌트의 이런 분석이 오히려 “현대에 씌어진 저술 중 관상생활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옹호”라고 보았다. 그는 ‘관상’에 대한 정교하고 설득력있는 아렌트의 비판을, 활동(곧 정치)이 그 뿌리가 되는 관상(사색의 능력)과 단절되면 퇴화하여 변질되고 만다는 메시지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상투어들의 치명적 힘

어떻든 아렌트의 이 책 덕분에 머튼은 현대에서 참된 관상가의 역할은 ‘활동’과 관련된 이런 역사를 이해하고 ‘속죄’하면서 시민생활의 공공성의 영역을 재발견하고 ‘사회적 혹은 정치적 실천’(praxis)의 가치를 복구하는 데에도 이바지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이런 맥락에서 특히 ‘침묵하지 않을 용기’가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분리’의 환상이 지속되고 확산되는 데에 ‘말’의 오염이 지대한 역할을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말의 오염은 ‘사유의 힘’이 상실된 것과 관련이 있고, 이것은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듯 이면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관상의 눈’의 상실과 이어질 뿐아니라, 아이히만식의 ‘생각없음(thoughtlessness)’ 혹은 타자의 입장과 고통에 대한 상상력의 부재(공감무능력)로도 곧바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말의 오염 문제는 관상가에게 크나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말의 회복은 사회적 실천(praxis)의 회복이기도 하거니와 관상(사유능력)의 회복이기도 하다. 그의 탁월한 언어감(言語感) 덕분이겠지만, 그는 이미 1960년대에 특히 정치와 언론 영역에서(그러나 교회와 수도원 안에서도!), 모든 말들이 광고카피처럼 되면서 생긴 언어의 남용-오용-악용 현상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실상 이렇게 만들어진 말들은 사람들의 정신을 지극히 효과적으로 지배계급의 의도대로 빚어나가고 ‘세뇌’시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정교분리’란 어쩌면 교리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 시대의 막강한 상투어중 하나로서, 결국에는 불의와 폭력으로 지탱되고 있는 기득권층의 질서를 편들고 고착시키는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정치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 “정치중립을 지켜야한다”는 말은 한국의 지배권력이 최근에도 남발해온 ‘3자개입 자제(금지)’란 말처럼, 사실상 매우 ‘정치적’ 발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사를 보나 국내의 역사를 보나, 그것은 종교를 정치세력의 하위파트너로 기능시키려는 또 다른 형태의 ‘정교결합’(더 정확히는 ‘野合’ 혹은 ‘和姦’)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하느님을 우리 삶에 어떤 간섭도 못하시게 만든다는 점에서 ‘악마적’이기까지 하고(마르 1,24 참조), 무신론보다 더 위험한 ‘실천적 무신론’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했다(하워드 진). 한때는 그 지배자의 자리에 총칼을 쥔 권력이 있었다면, 이제는 ‘돈’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무력이든 돈이든, 그들이 대중을 지배하는 가장 큰 도구가 바로 ‘말’이다. 실로, 죠지 오웰이 소설 <1984년>에서 잘 묘사한 것처럼, 대중의 말만 지배하면 그 생각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신문을 보느냐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그것은 우리가 매일 먹는 밥처럼 세상을 보는 우리 눈을 모르는 사이에 조정-조종하고 통제한다. 그것은 우리의 인간관, 사회관, 세계관을 모르는 사이에 처음부터 끝까지 콘트롤할 수 있고, 그리하여 역시 모르는 사이에 성경을 읽는 우리의 눈도 콘트롤할 수 있다.

말에 대한 머튼의 고민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었다. 말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리스도인 특히 수도승에게 있어서 공적 영역에서 그리스도교적 쇄신은 무엇보다 먼저 말의 쇄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제의식이었다. 인종차별 문제라든지 핵문제 같은 당대의 현안에 대해 그가 침묵을 깨고 발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런 문제의식에서였다.

▲영화 <신과 인간>의 한 장면

증언 2. 알제리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형제들과 크리스티앙 원장수사

1996년 5월 21일 알제리, ‘티브히린’이란 작은 마을의 ‘아틀라스의 성모 수도원’ 소속 7명의 엄률시토회 수도자가 ‘무장이슬람집단(GIA)’에 의해 처형되었다. 아래 글은 이 집단이 처음으로 수도원에 찾아왔던 1993년 12월 24일 성탄절 직후에 그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크리스티앙 드 셰르졔가 작성한 유언장이다.

“현재 알제리아의 테러단체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 전부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 어느 날이 바로 오늘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 제가 테러리즘에 희생이 되고 만다면 우리 수도공동체와 성교회와 가족들은 제 삶이 하느님께 그리고 이 나라에 온전히 바쳐진삶이었음을기억해주셨으면합니다. (…) 아울러, 저처럼 혹독한 폭력 아래 죽어간 수많은 이들, 끝내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만 이름 없는 이들의 죽음과 저의 죽음을 함께 연결시켜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한 목숨이 다른 한 목숨보다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습니다. 어떻든 이제 어린이처럼 순진무구하지는 않은 인생입니다. 불행히도 오늘날 세상에 우글거리는 악의 세력, 분간도 모르고 덤벼대는 악의 손아귀에 맞아 죽을 운명일지언정 저 또한 그와 같은 악에‘공범’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정도로는 나이를 먹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오면 잠깐이나마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생각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그리고 온 인류가족 형제들에게 죄의 사함을 청하는 동시에, 제 목을 내려치게 될 그 사람까지도 마음을 다하여 용서할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려 합니다.

오늘날 알제리 백성 전부를 하나로 싸잡아 멸시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이슬람주의 때문에 이슬람교 전체가 왜곡되고 과장되고 있는 현실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일부 극단주의자들의 원리주의와 한 통속이라고 생각해 버리고서 제 마음만 편해지려 한다면 이는 얼마든지 너무 손쉬운 일입니다.

(…) 제 죽음은 저를 순진한 이상주의자로 성급히 분류해버린 사람들에게 그들이 옳았다는 증거로 비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당신이 생각하던 바는 어찌 되었소?”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아셔야 합니다, 이제야말로 뜨겁게 타오르던 제 호기심이 풀리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말로 제 좁은 눈길은 가이없는 아버지 하느님의 눈길 속으로 흠뻑 잠겨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함께 당신의 자녀 이슬람의 아이들을 아버지께서 보시듯 그렇게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슬람 자녀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바라보되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빛나는 얼굴로, 그리스도 수난의 열매로, 성령의 선물을 가득히 받은 모습으로 아버지께서 보시듯 그렇게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민족, 서로 다른 종교일지언정 그 가운데서 같은 점, 유사한 점을 되찾아 친교를 이루어주시는 성령, 이는 정녕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서로 나누는 이들만이 아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듯 끝난 생명, 온전히 저의 것이요 온전히 그들의 것인 이 생명에 대해 이제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성령 안에 나눔으로써 얻는 바로 그 기쁨을 위하여 세상 일이 어찌 되었든,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제 생명을 온전히 원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감사(MERCI)”라는 말 안에 제 삶의 모든 것을 토로한 지금, 이제 이 한 마디 안에 어제와 오늘의 친구들을 담으렵니다. 이 땅의 친구들, 어머니와 아버지 쪽 친구들, 형제자매 쪽 친구들, 그들의 가족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백배나 넘치게 받았던 친구들 모두를 한 사람 한 사람 빠짐없이 담으렵니다.

그리고 또, 마지막 순간의 친구여, 스스로 무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그대도 함께 담으렵니다. 그렇습니다. 정녕 그대를 향해서도 이렇게 “감사하다”고, 또한 “주님 곁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A-DIEU) 안녕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둘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 둘 다 복된 ‘도둑’으로 낙원에서 다시 만나게 해 주시기를... 아멘! 인샬라!”(배성옥 선생 역)

타인을 위해 ‘바쳐진’ 삶

이 글에서도 우리 주제와 관련하여 많은 말씀을 전하고 있다. 먼저 크리스티앙은 자기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벗들을 위해, 자기 삶이 세상을 위해, 더 구체적으로 알제리와 알제리 사람들을 위해 통째로 ‘바쳐진 것’으로 알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타자를 위해 바쳐지지 않은 삶(수행)은, 제 아무리 ‘거룩하다’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정녕 그리스도인다운 삶(수행)이 아니라는 점을 곱씹어보게 되는 대목이다.

크리스티앙은 이어서 자기의 죽음을, 한없는 슬픔과 고난의 세월 중에 폭력으로 희생된 알제리 땅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억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위에서 이미 보았던 ‘연대’의 주제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폭력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모든 이의 죽음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타자’의 발견

여기서 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같은 교우들을 위한 것도 아니고 정말 ‘남’(타자)인 이슬람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저토록 극진한 사랑과 희생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하는 의문을 지니는 것도 같다. 영화 <신과 인간> 씨네토크 현장에서 직접 그런 취지의 질문을 받은 적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제 몸처럼 사랑”해야 할 이웃은 단지 혈연(가족)이나 지연(인종, 국가, 지방), ‘종연(宗緣)’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다. 즉, 이웃이란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이웃으로 삼을 것이냐는 내가 정하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아가, 이 이야기는 유대인이 아니라 멸시받는 주변인이던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파격을 지녔다. 주객이 뒤집어지는 체험, 이전까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만 객체로 쪼그라드는 체험, 이것이 장자(莊子)에 나오는 ‘송상(宋商)’ 이야기의 교훈이라고 하거니와, 이런 순간에 사람은 진실로 타자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 체험은 크리스티앙 자신이 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알제리전쟁 때 군복무를 했는데, 한 이슬람 친구가 글자 그대로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살아난 경험이 있고, 이것이 그의 성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샤를 드 푸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사제가 없는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며 투신하기 위하여 아프리카 이슬람 교도들에게 갔다. 그곳에서 아파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이웃 이슬람 친구들이 멀리까지 가서 염소젖을 구해다 살려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이슬람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제가 아니라 환대를 베풀 수 있는 상대임을 알아듣게 되었다. 우정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복음을 삶으로 외치는 것임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저희 수도회(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는 현재 많은 나라 이슬람 신도들 사이에서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친구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이슬람이 되길 바랍니다.”(강순화 자매의 편지)

크리스티앙은 결국 이슬람신자라는 타자를 이웃이요 형제, 아니 ‘벗’으로 선택했고, 그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친 복음의 증인(=순교자)인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이 사랑은 ‘환대’란 말로 더 훌륭히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인식과 책임

크리스티앙은 놀랍게도 자기를 ‘공범’이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가르칠 것이 있는 선각자나 의인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 감히 하늘을 우러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라고 말하던 세리처럼 인식하는 이 자세는 전혀 위선이 아니라 복음적 자기인식의 소산이다(루카 18,9-14 참조). 바로 이 복음적 겸손으로써 그는 세상을 낮은 자리에서 바라보며 세상의 죄와 죄인들에 대한 내적 책임을 느끼고, 역시 그런 자세로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디아스포라의 자리

크리스티앙이 타자들을 향한 이런 감각을 지니고 실천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스스로가 차별받는 가난한 약자요 경계인의 자리, 디아스포라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낮은 곳에서만, 가난하고 낮은 곳에 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알아뵙는 눈이 열린다.

공동증언

한 영웅적 신앙인 개인들의 순교담이 아니라 저마다 나름 허약하고 겁도 많은 형제들이 공동으로 식별하고 선택한 ‘공동증언’의 여정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들은 우리 시대를 위한 수행의 모델이 된다. 공동체는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을 지배하는 세력(자기중심, 자기확장, ‘성공’이나 ‘성장’을 향한 집착 등)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로 참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타자수행’의 장이다. 모쪼록, 비록 작고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그리고 늘 쉬운 것은 결코 아니지만, 세상을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리하여 ‘대안이 되는’ 모듬살이, ‘대조 공동체(kontrastgesellschaft)’의 수가 늘어나길 소망한다.


결론을 대신하여

1996년 4월 18일 ‘무장이슬람집단’의 통지문 43 : 참수의 ‘신학적’ 이유

“무릇 수도승은 세상으로부터 떠나 수방(修房)에 은거하여 잠심하는 사람이다. 나지르인들 사이에서 이들은 은수자라고 불린다. 아부 바크르 알 시딬은(제 2대 칼리프) 이런 이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런 수도승이 자기 은수처를 떠나 사람들과 섞이게 되면 그를 죽이는 일은 적법하다. 우리가 포로로 잡고 있는 이 수도승들이 그런 경우로서, 이들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며 복음화를 꾀했다. 그들에 대해 고발한 내용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세상 밖으로” 나와 정치같은 영역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말라는 힘을 쥔 자들의 생각(수행교리?)을 거슬러, 이들은 “더 세상 안으로 덜 세속적으로(plus in hoc mundo, minus de hoc mundo)”라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스승처럼 세상 안에서 ‘구경거리(theoria)’(루카 23,48)가 되었다. 그들은 정녕 참된 관상가였으니, 세상의 힘있는 말들이 가르쳐준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는 그대로 타자를 볼 수 있었다. 타자 안에서 하느님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환대함으로써 하느님을 환대할 수 있었다. 타자 안에서 하느님을 뵐 때만 타자들은 우리 안에서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이연학 신부(올리베따노 베네딕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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